해인과 의통인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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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위 작성일17-06-13 20:58 조회5,311회 댓글0건본문
출처. 해인(海印)과 의통인패(醫統印牌)에 대한 바른 이해
해인(海印)과 의통인패(醫統印牌)에 대한 바른 이해
1) 해인(海印)에 대하여.
증산종단 일부에서 '해인(海印)'이라고 부르는 것은,현무경의 언청계용부(言聽計用符)라고 불리는 오부(午符)를 복숭아나무조각에 새겨서 도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급살병이 돌 때, 책임자와 6명이 한 조가 된 의통구호대가, 죽은사람의 인당(印堂)에 경면주사를 묻힌 오부(午符)를 찍어 살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그 해인이 아닙니다.
이상호 선생이 김형렬 선생의 행동을 참고하여, 임의로 제작하여 만든 것입니다. 물론 사용법도, 증산상제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임의로 만든 것입니다.
이상호 선생이 <해인(海印))>을 <오부(午符)>로 생각하여 만든 경위는 이렇습니다.
증산상제님이 김형렬 선생에게 "나를 잘 믿는 자에게 해인(海印)을 전하여 주리라."는 내용을 익히 알고 있었던 이상호 선생께서는, 항상 그 <해인>이 궁금했습니다. 김형렬 선생이 <해인>의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이상호 선생은, 김형렬 선생의 모든 행적을 유심히 살펴보게 됩니다.
김형렬 선생은,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태어난 해의 지지(地支)에 해당하는 동물을 그려 소지(燒紙)하며,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형렬 선생은 임술생이므로, 개그림을 그려서 불살라야 하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항상 현무경에 나오는 오부를 그려 불사르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제자들에 의해서 김형렬 선생의 행동이 탄로나게 되지만, 여하튼 이상호 선생은, 김형렬 선생이 오부(午符)를 불사르는 것을 보면서,구체적으로 물어보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 '오부(午符)가 틀림없는 해인(海印)'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증산상제님께서, 김형렬 선생으로 하여금 육십사괘를 점치게 하시고 이십사방위자를 둘러 쓰이사 태양을 향해 불사르시면서, "여아 동거하자." 하시고, 형렬을 돌아보시며 "잘 믿는자에게 해인을 전하여 주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임의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 이후 이상호 선생은 김형렬 선생으로부터 해인의 비밀을 알아냈다고 생각하고, 복숭아 나무에 오부(午符)를 새긴 도장을 '해인(海印)'이라고 발표하게 됩니다. 또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증산상제님의 행적을 면밀히 고찰하고 요한계시록을 참고하여, 오부(午符)인 해인(海印)을 활용한 의통구호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매인이 육인씩 전하라'는 증산상제님의 말씀을 참고로 7명이 한 조가 된 의통구호대를 조직하여, 책임자는 죽은자의 인당에 "어명이야!" 하면서 해인을 치고, 나머지 사람은 청수를 먹이고, 손발과 가슴을 주무르고, 태을주를 읽고, 성명을 기록하는 등등의 역할분담 방법으로, 의통구호활동을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상호 선생이 임의로 제작한 해인(海印)의 법방을 사용하여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몇몇의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그러나 급살병도 돌지 않았는데 해인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해인은 병겁이 돌 때에만 사용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스스로 모순 되는 행위이고, 만일 살아났다면 해인에 의해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원래 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적(符籍)를 태운 재를 먹여서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동학도들의 얘기에 대해, 증산상제님께서는 "비위만 상하게 할 뿐이요, 살아난 사람은 원래 살 사람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앞서 밝힌 해인(海印)에 관련된 이러저러한 내용들이, 이상호 선생 생존 당시의 핵심간부들에 의해 전해져 오늘날 명명백백한 사실처럼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해인(海印)은 유형(有形)의 물건이 아니며, 더이상 실물(實物)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해인은, 일심으로 증산상제님을 믿고 마음을 잘 닦은 자에게 무형(無形)의 기운으로 내리는 성령(聖靈)임을, 증산상제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 하루는 김형렬을 명하사 육십사괘를 점치고 이십사방위자를 둘러쓰게 하사 태양을 향해 불사르시며 "여아동거하자." 하시고, 종도들에게 "잘 믿는 자에게 해인을 전하여 주리라." 하시며, "세상사람은 해인사에 해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정씨의 것으로 아나, 실물은 없고 기운만 있는 것을 내가 가지고 왔으니, 일심자에게 전해 주리라." 하신지라. (용화전경 p83)
2) 의통인패(醫統印牌)에 대하여
해인(海印)과 의통인패(醫統印牌)를 혼동하여 알고 있는 신앙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1) 해인(海印)은,
김형렬선생이 오부(午符)를 불사르는 것을 이상호선생이 보고 임의로 해석하여, 복숭아 나무에 오부(午符)를 도장으로 새겨 경면주사를 묻혀 죽은 사람의 인당(印堂)에 친다고 알고 있는 것이고,
(2) 의통인패(醫統印牌)는,
박공우 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일순>, <시헌>, <태을주>, <신장공우>, <무사태평>을 복숭아 나무에 새긴 도장을 종이에 찍어 호부와 호신부를 제작해, 호신부는 허리에 차고 호부는 문앞에 붙인다는 것입니다.
(1) 해인에 대해서는, 이상호 선생이 임의로 만들어 사용하려던 것으로서, 증산상제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앞에서 밝혔습니다.
(2)의통인패는 해인과는 달리, 증산상제님께서 친히 그 제작법과 사용법을 자세하게 박공우 선생에 전하신 것입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어천하시기 하루전인1909년 6월 23일 밤에, 박공우 선생을 구릿골 약방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차경석 선생이 몰래 엿듣다가 무서워서 더이상 엿듣지 못하고 물러나오자, 박공우선생에게 의통인패의 제작법과 사용법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거의 같습니다.
무진년 봄철이 되면, 원평에 가서 기거하도록 말씀하시면서, "그 때 돈이 마련될 것이니,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 밑에 제수를 차려놓고 나에게 치성을 올리고, 동도지를 가지고 <일순>, <시헌>, <태을주>, <신장공우>, <무사태평>의 도장을 새겨 경면주사를 묻혀 종이에 찍어 호부와 호신부를 만들어 허리에 차고 문에 붙여라."고 당부하시고, "병겁이 터지면 천심자에게 의통인패를 전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의통인패는 병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예방약과 같습니다.
이상호 선생에게 의통인패가 전해진 경위는 2가지 설이 있습니다.
(1) 이상호 선생측 주장
증산상제님께서는, 박공우 선생에게 의통인패 두 벌을 만들어서, 한 벌은 무진년(1928) 동지에 용화동에서 기두하는 이상호 선생에게 전하고, 또다른 한 벌은 박공우 선생이 보관하라고 하셨다. 이상호 선생은 무진년 동지에, 박공우 선생의 집례로 용화동에서 동화교 개교치성을 모시고, 며칠후에 치성을 모신 자리에서 각자공(刻字工) 정수흠으로 하여금 의통인패를 새기게 하여 서로 한 벌씩 나누어 가졌다.
박공우 선생이 보관하던 의통인패는, 박공우 선생이 기거하는 방의 아랫목 벽속에 넣어두었는 데, 박공우 선생이 돌아가신 직후 송종수라는 제자가 살펴보니, 그 벽의 헐어진 잔해가 마당 한쪽에 내버려져 있었다. 뒤져보니 한 개의 도장을 찾지 못해 쓸모없게 되었다. 또는 삭아서 없어졌다.
해방이 되자, 이상호 선생은 의통구호활동을 하려면 육임을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생 이정립 선생과 더불어, 의통을 공개하고 포교에 전력을 기울였다.
1950년 6.25사변이 나자 병겁이 터질것으로 확신하고, 육임조직을 짜서 의통인패를 제작 배부하여, 서울 합정동과 충남 온양을 근거지로 의통구호활동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병겁이 터지지 않자 의통인패를 회수하여 치성을 모시고 다시 보관하였으나, 일부방면에 배부된 의통인패가 회수되지 않자, 보안상 의통인패를 불살랐다고 공포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이정립 선생이 사망한 1968년 까지 의통인패를 몇차례 제작하고, 그 이후에도 추가제작하여 현재까지 보관하여 오고 있다.
(2) 박공우 선생측 주장
증산상제님께서는, 박공우 선생에게, 의통인패를 많이 만들어 두었다가, 병겁이 터지면 자신의 덕을 펼 사람에게 전해주라고 하셨다.
박공우 선생은 병겁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돌림병이 돌자 자기나름대로 병겁상황이라고 판단하여, 만들어둔 의통인패를 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입이 삐뚤어지는 등 도저히 몸과 정신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고 병겁상황이 아님을 알았고 더이상 기다릴 수 없어, 증산상제님께 치성을 드려 잘못을 사죄하고는, 의통인패 두 벌만 샘플로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남겨진 의통인패 두 벌은, 박공우 선생 부인께서 기거하는 마루밑 깊숙히 사과나무 궤짝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상호 이정립 선생이 그 사실을 알고, 박공우 선생 부인집에 와서 "두 벌이 있으니 한 벌은 주어도 괜찮지 않느냐"라고 말하면서 쌀10가마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웠던 박공우 선생 부인께서는, 한 벌이 있으니 괜찮다는 이상호 이정립 선생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한 벌을 내 주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박공우 선생께서는, 자신이 부인을 너무 고생시킨다는 미안한 마음도 들고 의통인패 한 벌이 있으면 되었다라는 생각에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결론을 정리하면,
해인(海印)은 증산상제님께서 잘 믿는 자에게 직접 내려주시는 무형(無形)의 기운으로, 오부(午符)를 새긴 도장은 해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통인패(醫統印牌)는 증산상제님이 박공우 선생에게 직접 제작을 지시하신 것으로 사실이 맞습니다. 다만 박공우 선생으로부터 의통인패가 누구에게 어떻게 전해져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행간의 뜻을 헤아려 각자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해인과 의통인패로 인해, 많은 증산신앙인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강력한 신앙을 할 수 있었고,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동안의 과정을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매도하는 것은, 올바른 증산신앙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다만 증산상제님이 돌아가신 지 100년이 가까워지면서, 많은 상제님신앙인들이, 상제님신앙의 핵심요소라고 믿고 있는 <해인>과 <의통인패>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서, 그간 해인에 대해 가졌던 환상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차분하게 정리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하였습니다.
이제는 상제님신앙의 방향에 있어서도 새로운 자세가 필요합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면서도, 증산상제님의 마음을 찾아 그분의 인격을 본받아, 우리들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영성을 높이는 일에 매진하여야 하겠습니다.
출처. 해인(海印)과 의통인패(醫統印牌)에 대한 바른 이해
작성자 착한사람 15-12-23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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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海印)은 증산상제님께서 실물은 없고 기운만 있는 것을 가지고 왔으니, 일심자에게 전해 주리라 하셨듯이, 형체가 없는 무형의 것이라는것을 알 수 있고,
의통인패는 상제님께서 박공우 성도에게 제작법과 실물을 전하였으나,
1. 차경석 성도가 숨어서 엿들은것이 경전에 실린점.
2. 수석성도인 김형렬 성도에게는 의통인패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
3. 증산상제님 천지공사 대의의 모든것이 '의통인패 소지'일 수는 없다는 점.
등등 의통인패 존재 유무에 대해서 찬반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괴질병겁이 발생했을 시 의통인패를 지녔다 하더라도 의통인패의 실질적인 유효성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통인패를 소유하느냐, 소유하지 않아도 되느냐의 문제 보다는 증산상제님, 법륜수부님의 천지공사 대의를 바탕으로 한 말씀을 기준으로 마음을 닦고, 덕을 베풀고, 좋은 일 많이 하는것이 근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천지에서 다 죽인다 해도, 신명들이 그 사람은 죽일려고 해도 차마 죽일수가 없다고 할 사람이라면 의통인패를 가졌건 못 가졌건간에 신명들이 알아서 의통인패를 구해주지 않을까요?
또한, 이 의통인패로 인해서 갖은 사이비 교단들이 출몰하고, 병겁출몰시 반드시 소지해야할 물건으로 홍보하여, 많은 사람들이 금전적인 피해를 보고 있으니 의통인패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분석과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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