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증산 상제님 신앙형태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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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우 (175.♡.21.87) 작성일17-10-24 11:10 조회7,625회 댓글2건본문
신앙 형태에 대한 고찰
강증산 상제님께서 지상에 내려와 9년 천지공사를 보시고 어천(1909년)하신지 110여년이 지난 현재. 과거를 돌아보고 지금 강증산 상제님을 신앙하고 있는 종도들의 신앙 형태는 어떻게 변화하여 왔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헌 비교와 연구, 생각에 의한 글이며 어떤 공식적인 효력을 발휘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편히 보시면 됩니다.
필자는 강증산 상제님을 신앙하는 형태가 다음과 같이 흘러왔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신앙의 상속화. 또는 세습화.
강증산 상제님을 모시던 그때 당시 종도들께선 상제님께서 어천하신후, 뿔뿔히 흩어졌다. 그 후, 신앙이라는 것은 천지공사에 참여하였던 고판례 수부님(선도교), 차경석(보천교), 김형렬(미륵불교), 안내성(선도), 박공우(박인암교단), 문공신(문영상교단), 강순임(증산법종교) 종도님들 기준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라. 종도들에겐 포교를 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었고, 강증산 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분들이기 때문에 상제님 어천후 그들이 도운을 인류사에 뿌리 내릴수 있었던 주체였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그들 외에는 증산 상제님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강증산 상제님의 천지공사 라든지, 도법이라든지, 신앙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강증산 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종도들께서 세운 교단들. 이 시대를 ‘신앙의 상속화, 세습화’ 시대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흘러 후속 신앙 단체들이 생기게 되었고, 포교활동은 더욱 더 활발해 져 신앙의 대중화 형태가 되었다.
선발 주자들의 포교활동에 상제님 강세를 전해 들은 후발 주자들은 사람들 가운데 인력, 재력 등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단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분들은 아니고, 그 후에 상제님 도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포교하고자 인생을 바친 분들이라 생각됩니다. 교단의 창설 과정중에 다소 불의한 행위들도 발견되고, 난법난도의 형태도 발견되는데 이는 생략하고 탄생된 교단을 보자면, 조철제의 태극도, 박한경의 대순진리회, 안세찬의 증산도 등등이 있다. 이들이 전체적인 신앙 형태 변화 과정에서 왜 중요하냐 하면, 이 때의 교단들은 차경석 종도님의 보천교와 비슷하게 그 교단의 권세가 막강했고, 포교활동에 많은 공을 들였다. 지금도 잘 알다시피 ‘도를 아십니까?’는 그 교단의 정체성이 문제가 있건 없건간에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포교를 하게 되었고, 증산도의 상생방송 방송국 개설도 지역 거리와는 관계없이 집 안방에서 상제님의 도를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누가 집에 돈이 좀 있고, 사람 좀 거느린다고 이러한 신앙의 규모를 만들 수 있으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상제님의 도를 알게 되었고, 아울러 신앙을 하게 되었고, 규모도 확장되었습니다. 이 때를 ‘신앙의 대중화’ 시대라 이름 붙였습니다.
세 번째, 신앙의 민주화. 지금은 신앙의 민주화 시대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 근거에 대해서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혹시 20세기(1900년대)부터 21세기(200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사회 구조의 변화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신적 있나요? 제가 1900년대 후반에 태어나서 초기의 사회정세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뉴스나 기사, 얘기들을 통해 들어보면, 사회가 한창 성장, 발전해 나가는 과정 중에서 그 주체가 누구였냐. 쉽게 얘기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체가 누구였냐 하면, 초반은 정치세력, 대기업들이었습니다. 더 쉽게 얘기해서 보수층이었다는 것입니다. 인력과 재력의 기반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사회 조직이 형성되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우리 나라를 이끌어 왔습니다. 누가 이를 부정할 수 있을까요? 현대, 삼성 그룹.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정치 세력들. 이들 때문에 우리 나라가 현재 있는것입니다.
하지만, 19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사회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주체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대중들입니다. 사회 기반이 발전되고, 안정되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해지자 대중, 시민들이 사회를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갑니다. 1900년대 후반에 여러 시민단체들도 생기게 되고, 너도 나도 대중가요를 부르며, 갖가지 사회, 취미, 경제, 예술 모임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대중들이 깨어난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예전 노예나 노동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같이 사회, 정치, 경제에 참여하게 되었고, 사회를 주름잡던 정치경제 세력들은 이 대중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대중화 시대였던 것이죠.
시간은 더 흘러 지금은 2000년대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직관적인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1900년대 같았으면 대통령이라 했겠지요. 아닌것 같나요? 기억을 되새겨 보시면 옛날에는 왕을 나랏님이라 불렀습니다. 왕이 곧 국가였고, 나라였습니다. 왕이 나라의 정치경제를 결정했고, 선왕이 나오면 국민은 행복했고, 악왕이 나오면 국민들 삶은 초라해졌습니다. 1900년대 나라의 주인은 대통령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 의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국민들이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합니다. 역사적으로 국민들이 왕을 갈아치운 나라들이 몇몇 있죠? 대부분 혁명이라 하기도 하고, 개혁이라 하기도 합니다. 국민들은 더 이상 나라 운영에 세금 내기만 하고 , 듣기만 하는 수동적 주체가 아니라, 국가 운영에 직접 참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능동적인 국가 운영의 주체입니다. 이전 시대의 ‘대중’과 ‘민주’의 차이를 보자면, ‘대중’은 수동적이고, ‘민주’는 주체적입니다. 정치세력들은 ‘대중’들은 우습게 보았지만, ‘민주’주의 정신을 가진 국민들은 우습게 보질 못합니다.
기나긴 썰을 정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지금의 강증산 상제님 신앙 형태를 ‘신앙의 민주화’ 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신앙의 형태는 초기 소수의 종도들만 알고, 지켜왔던 세습, 독점의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상제님의 도를 알게 되는 신앙의 대중화 과정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성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많이 알게는 되었지만, 대중들은 어디까지나 대중일뿐, 주체적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신앙해야 될지도 몰랐고, 믿음 반 의심 반. 어느 누가 얘기하면 죽자사자 따라갈 뿐이었습니다. 대중화 과정에서 정보의 독점세력들이 나오게 되었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부정부패, 폐단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이비 교주가 출몰하게 되었고, 사람을 끌어모았고, 돈을 끌어모았고, 종도들에게 삶의 허무함만 남겨놓을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신앙의 역사를 알아봐야 했으며, 내가 신앙의 중심을 세워야 했으며, 같이 신앙을 해야 할 사람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신앙을 해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누가 뭐다, 내가 뭐다, 여기는 어떤 소수만 아는 비밀이 있는곳이다, 이런 얘길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비록 내가 그걸 모를지언정, 내 인생까지 허무하게 다른곳에 바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은 누구나 천지부모님의 아들딸이고, 그 아들딸들은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어느 소수만이 어떤 비결이나 비밀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상제님을 따랐던 종도들 개개인에게는 맡기신 도수는 있었지만, 그 후에 상제님, 수부님을 알게 된 종도들에게는 상제님을 신앙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밖에 없습니다. 일찍 믿건, 나중에 믿건 차이가 없습니다. 다같이 공평하게 신앙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정보화 시대에는 비밀이란게 없습니다. 속된 말로 디비보면 다 나옵니다. 좋은 정보이든, 나쁜 정보이든 다 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만 보장되는 비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개돼지라고 폄하되었던 대중들이 아니고, 민주주의 주인인 것입니다.
신앙을 어떻게 할까? 무엇을 해야 될까? 누구를 모셔야 할까? 내 선생님은 누굴까? 누구 밑으로 들어가야 될까? 상제님 신앙 해보면서 이런 고민 안해보신 분 있습니까? 나는 모르겠는데 누구 아는 사람 없을까?
이제 이런 생각들이 점차 바뀔것입니다.
집집마다 제사는 지내는데 제사 지내는 방식은 다 다릅니다. 음식도 다르고, 절차도 다르고, 집안사정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제사는 지냅니다.
집집마다 신앙을 하는데 신앙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읽는 주문도 다르고, 절차도 다르고, 집안사정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신앙은 할 것입니다.
궁금하면 물어야 되죠. 나보다 더 잘 아는 분에게 묻기도 하고, 전혀 모를것 같은 사람에게도 조언을 구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스스로 답이 나옵니다. 스스로 신앙에 대해서 깨쳐 가는겁니다. 모르는데 어찌하겠어요? 스스로 알아야지. 스스로 체득해야지. 또 누가 그걸 그냥 가르쳐 줍니까? 그래서 이런 저런 모임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통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것은, 이제는 그 신앙형태가 수동적인 대중이 아닌 능동적인 자기자신이라는 것.
누가 대두목이란다. 저라면 안가겠습니다.
누가 대선생이란다. 그래도 안가겠습니다.
누가 강증산 상제님이란다. 가볼까 한번 생각 해보겠습니다.
신앙은 내가 하는것이지, 남이 도와주는 것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믿는것도 아닙니다. 누가 가르쳐줘서 선생님 해답을 내려주십시오 하는것도 아닙니다. 더 이상 누구에게 속을 필요도 없고, 내 마음 하나 바르게 닦고, 주문 읽고, 청수 모시고, 상제님, 수부님 생각하면서 신앙하면 됩니다. 모르는건 물어야지요. 신앙 선배님들은 어떻게 할까 찾아가보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얘기도 하고, 술도 한잔 마시고, 부댖기며 살아야지요. 그렇게 사람들과 서로 알아가면서 정 붙이고 인생을 살아가야지요. 옆에서 나 대두목이요. 그러면 미친X... 마음속으로 욕 한번 해주고, 천지공사에 뭘 해야 되니 돈좀 보태라고 그러면 벼룩같은X 욕 한번 해주고, 잊으면 되는것이지요. 그리고 자기 신앙 하면서 서로 느낀점도 얘기하고, 좋은 일 있으면 소통하고, 배울점은 따담고, 나쁜점은 반성하고.. 같이 신앙하는거에요.. 누구나 천지부모님의 아들딸입니다. 큰아들에게 더주고, 막내아들에게 더더주고? 상제님 수부님은 그런것 없을것으로 보입니다. 천리는 지공무사라. 소수에게 좋은거 보태주면, 천지에서 난리 납니다. 도통도 마음대로 못주십니다. 공평해야지. 도통주십시오 하고 매달려 있는 분들 반성하세요..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해 보자면, 신앙의 주체는 본인이 주인입니다.
강증산 상제님께서 지상에 내려와 9년 천지공사를 보시고 어천(1909년)하신지 110여년이 지난 현재. 과거를 돌아보고 지금 강증산 상제님을 신앙하고 있는 종도들의 신앙 형태는 어떻게 변화하여 왔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헌 비교와 연구, 생각에 의한 글이며 어떤 공식적인 효력을 발휘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편히 보시면 됩니다.
필자는 강증산 상제님을 신앙하는 형태가 다음과 같이 흘러왔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신앙의 상속화. 또는 세습화.
강증산 상제님을 모시던 그때 당시 종도들께선 상제님께서 어천하신후, 뿔뿔히 흩어졌다. 그 후, 신앙이라는 것은 천지공사에 참여하였던 고판례 수부님(선도교), 차경석(보천교), 김형렬(미륵불교), 안내성(선도), 박공우(박인암교단), 문공신(문영상교단), 강순임(증산법종교) 종도님들 기준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라. 종도들에겐 포교를 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었고, 강증산 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분들이기 때문에 상제님 어천후 그들이 도운을 인류사에 뿌리 내릴수 있었던 주체였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그들 외에는 증산 상제님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강증산 상제님의 천지공사 라든지, 도법이라든지, 신앙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강증산 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종도들께서 세운 교단들. 이 시대를 ‘신앙의 상속화, 세습화’ 시대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흘러 후속 신앙 단체들이 생기게 되었고, 포교활동은 더욱 더 활발해 져 신앙의 대중화 형태가 되었다.
선발 주자들의 포교활동에 상제님 강세를 전해 들은 후발 주자들은 사람들 가운데 인력, 재력 등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단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분들은 아니고, 그 후에 상제님 도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포교하고자 인생을 바친 분들이라 생각됩니다. 교단의 창설 과정중에 다소 불의한 행위들도 발견되고, 난법난도의 형태도 발견되는데 이는 생략하고 탄생된 교단을 보자면, 조철제의 태극도, 박한경의 대순진리회, 안세찬의 증산도 등등이 있다. 이들이 전체적인 신앙 형태 변화 과정에서 왜 중요하냐 하면, 이 때의 교단들은 차경석 종도님의 보천교와 비슷하게 그 교단의 권세가 막강했고, 포교활동에 많은 공을 들였다. 지금도 잘 알다시피 ‘도를 아십니까?’는 그 교단의 정체성이 문제가 있건 없건간에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포교를 하게 되었고, 증산도의 상생방송 방송국 개설도 지역 거리와는 관계없이 집 안방에서 상제님의 도를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누가 집에 돈이 좀 있고, 사람 좀 거느린다고 이러한 신앙의 규모를 만들 수 있으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상제님의 도를 알게 되었고, 아울러 신앙을 하게 되었고, 규모도 확장되었습니다. 이 때를 ‘신앙의 대중화’ 시대라 이름 붙였습니다.
세 번째, 신앙의 민주화. 지금은 신앙의 민주화 시대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 근거에 대해서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혹시 20세기(1900년대)부터 21세기(200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사회 구조의 변화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신적 있나요? 제가 1900년대 후반에 태어나서 초기의 사회정세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뉴스나 기사, 얘기들을 통해 들어보면, 사회가 한창 성장, 발전해 나가는 과정 중에서 그 주체가 누구였냐. 쉽게 얘기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체가 누구였냐 하면, 초반은 정치세력, 대기업들이었습니다. 더 쉽게 얘기해서 보수층이었다는 것입니다. 인력과 재력의 기반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사회 조직이 형성되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우리 나라를 이끌어 왔습니다. 누가 이를 부정할 수 있을까요? 현대, 삼성 그룹.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정치 세력들. 이들 때문에 우리 나라가 현재 있는것입니다.
하지만, 19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사회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주체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대중들입니다. 사회 기반이 발전되고, 안정되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해지자 대중, 시민들이 사회를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갑니다. 1900년대 후반에 여러 시민단체들도 생기게 되고, 너도 나도 대중가요를 부르며, 갖가지 사회, 취미, 경제, 예술 모임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대중들이 깨어난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예전 노예나 노동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같이 사회, 정치, 경제에 참여하게 되었고, 사회를 주름잡던 정치경제 세력들은 이 대중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대중화 시대였던 것이죠.
시간은 더 흘러 지금은 2000년대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직관적인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1900년대 같았으면 대통령이라 했겠지요. 아닌것 같나요? 기억을 되새겨 보시면 옛날에는 왕을 나랏님이라 불렀습니다. 왕이 곧 국가였고, 나라였습니다. 왕이 나라의 정치경제를 결정했고, 선왕이 나오면 국민은 행복했고, 악왕이 나오면 국민들 삶은 초라해졌습니다. 1900년대 나라의 주인은 대통령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 의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국민들이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합니다. 역사적으로 국민들이 왕을 갈아치운 나라들이 몇몇 있죠? 대부분 혁명이라 하기도 하고, 개혁이라 하기도 합니다. 국민들은 더 이상 나라 운영에 세금 내기만 하고 , 듣기만 하는 수동적 주체가 아니라, 국가 운영에 직접 참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능동적인 국가 운영의 주체입니다. 이전 시대의 ‘대중’과 ‘민주’의 차이를 보자면, ‘대중’은 수동적이고, ‘민주’는 주체적입니다. 정치세력들은 ‘대중’들은 우습게 보았지만, ‘민주’주의 정신을 가진 국민들은 우습게 보질 못합니다.
기나긴 썰을 정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지금의 강증산 상제님 신앙 형태를 ‘신앙의 민주화’ 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신앙의 형태는 초기 소수의 종도들만 알고, 지켜왔던 세습, 독점의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상제님의 도를 알게 되는 신앙의 대중화 과정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성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많이 알게는 되었지만, 대중들은 어디까지나 대중일뿐, 주체적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신앙해야 될지도 몰랐고, 믿음 반 의심 반. 어느 누가 얘기하면 죽자사자 따라갈 뿐이었습니다. 대중화 과정에서 정보의 독점세력들이 나오게 되었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부정부패, 폐단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이비 교주가 출몰하게 되었고, 사람을 끌어모았고, 돈을 끌어모았고, 종도들에게 삶의 허무함만 남겨놓을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신앙의 역사를 알아봐야 했으며, 내가 신앙의 중심을 세워야 했으며, 같이 신앙을 해야 할 사람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신앙을 해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누가 뭐다, 내가 뭐다, 여기는 어떤 소수만 아는 비밀이 있는곳이다, 이런 얘길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비록 내가 그걸 모를지언정, 내 인생까지 허무하게 다른곳에 바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은 누구나 천지부모님의 아들딸이고, 그 아들딸들은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어느 소수만이 어떤 비결이나 비밀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상제님을 따랐던 종도들 개개인에게는 맡기신 도수는 있었지만, 그 후에 상제님, 수부님을 알게 된 종도들에게는 상제님을 신앙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밖에 없습니다. 일찍 믿건, 나중에 믿건 차이가 없습니다. 다같이 공평하게 신앙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정보화 시대에는 비밀이란게 없습니다. 속된 말로 디비보면 다 나옵니다. 좋은 정보이든, 나쁜 정보이든 다 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만 보장되는 비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개돼지라고 폄하되었던 대중들이 아니고, 민주주의 주인인 것입니다.
신앙을 어떻게 할까? 무엇을 해야 될까? 누구를 모셔야 할까? 내 선생님은 누굴까? 누구 밑으로 들어가야 될까? 상제님 신앙 해보면서 이런 고민 안해보신 분 있습니까? 나는 모르겠는데 누구 아는 사람 없을까?
이제 이런 생각들이 점차 바뀔것입니다.
집집마다 제사는 지내는데 제사 지내는 방식은 다 다릅니다. 음식도 다르고, 절차도 다르고, 집안사정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제사는 지냅니다.
집집마다 신앙을 하는데 신앙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읽는 주문도 다르고, 절차도 다르고, 집안사정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신앙은 할 것입니다.
궁금하면 물어야 되죠. 나보다 더 잘 아는 분에게 묻기도 하고, 전혀 모를것 같은 사람에게도 조언을 구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스스로 답이 나옵니다. 스스로 신앙에 대해서 깨쳐 가는겁니다. 모르는데 어찌하겠어요? 스스로 알아야지. 스스로 체득해야지. 또 누가 그걸 그냥 가르쳐 줍니까? 그래서 이런 저런 모임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통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것은, 이제는 그 신앙형태가 수동적인 대중이 아닌 능동적인 자기자신이라는 것.
누가 대두목이란다. 저라면 안가겠습니다.
누가 대선생이란다. 그래도 안가겠습니다.
누가 강증산 상제님이란다. 가볼까 한번 생각 해보겠습니다.
신앙은 내가 하는것이지, 남이 도와주는 것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믿는것도 아닙니다. 누가 가르쳐줘서 선생님 해답을 내려주십시오 하는것도 아닙니다. 더 이상 누구에게 속을 필요도 없고, 내 마음 하나 바르게 닦고, 주문 읽고, 청수 모시고, 상제님, 수부님 생각하면서 신앙하면 됩니다. 모르는건 물어야지요. 신앙 선배님들은 어떻게 할까 찾아가보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얘기도 하고, 술도 한잔 마시고, 부댖기며 살아야지요. 그렇게 사람들과 서로 알아가면서 정 붙이고 인생을 살아가야지요. 옆에서 나 대두목이요. 그러면 미친X... 마음속으로 욕 한번 해주고, 천지공사에 뭘 해야 되니 돈좀 보태라고 그러면 벼룩같은X 욕 한번 해주고, 잊으면 되는것이지요. 그리고 자기 신앙 하면서 서로 느낀점도 얘기하고, 좋은 일 있으면 소통하고, 배울점은 따담고, 나쁜점은 반성하고.. 같이 신앙하는거에요.. 누구나 천지부모님의 아들딸입니다. 큰아들에게 더주고, 막내아들에게 더더주고? 상제님 수부님은 그런것 없을것으로 보입니다. 천리는 지공무사라. 소수에게 좋은거 보태주면, 천지에서 난리 납니다. 도통도 마음대로 못주십니다. 공평해야지. 도통주십시오 하고 매달려 있는 분들 반성하세요..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해 보자면, 신앙의 주체는 본인이 주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교주에게도 매어있지 않고, 유능한 사람에게도 매여있지 않습니다. 신앙을 하는 사람들은 이제 멍청한 대중이 되려 하지 말고, 주체적인 민주주의 신앙을 해야 합니다.
하루는 공사를 보실새 방문을 열어 놓으시더니, 허공을 향하여 천음을 크게 하사 가라사대 "어찌 이러할 수 있으리. 남에게 의뢰하는 근성을 벗어날 것이며, 남의 종지기 근성을 벗어나라. 어찌 사람의 인격으로서 이러할 수 있으리요." 하시고, 문을 닫으시며 공사를 계속 보시였다 하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p250-251)
또 가라사대 "너희들은 깨달으라. 너희는 나의 충직한 종복(從僕)이 되지 말고 어진 벗이 되도록 하라." 하시였다 하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82)
또 가라사대 "너희들은 깨달으라. 너희는 나의 충직한 종복(從僕)이 되지 말고 어진 벗이 되도록 하라." 하시였다 하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82)
어느날 공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이 저의 인격을 확실히 찾아 알아야 우주간에 자기가 실지로 있는 것일 진대, 하물며 너의 인생까지 버리고 다른 타물에 있다고 의지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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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님의 댓글
감나무 아이피 223.♡.179.111 작성일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aspirin님의 댓글
aspirin 아이피 203.♡.74.217 작성일
현우님 글에 많은 공감이 갑니다.
지금까지 대두목이라고 하신 분들 다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상제님 진리의 독점권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가칭 대두목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깨어난 신앙을 할 때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