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전서문에 담긴 상제님의 심법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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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북극성 (124.♡.171.168) 작성일14-02-09 11:35 조회8,158회 댓글4건본문
서전서문에 담긴 상제님의 심법전수
[들어가는 말]
오늘은 상제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서전서문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눌까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야말로 상제님 가르침의 핵심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대두목 타령”, “천자 노름” 운운하는 모든 주장을 일소하고, 상제님께서 진정 후대 신앙인들에게, 특히 교단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했던 참 가르침이 서전서문에 대한 말씀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해당 성구를 살펴봅니다.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라
1 상제님께서 경석을 남달리 사랑하시어 “허물을 깨닫고 덕을 닦으라.” 하고 거듭 당부하시니라.
2 하루는 경석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조정(朝廷)에 설 사람은 서전서문(書傳序文)을 많이 읽어야 하느니라.
3 너는 만 번을 읽으라. 대운(大運)이 그에 있느니라.” 하시니라.
4 이에 경석이 상제님의 명을 좇아 바깥출입을 일절 금하고 조용히 앉아 밤낮으로 서전서문을 읽으니
5 상제님께서 친히 밥상을 가져다주시고 궂은 일을 손수 하시며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기르듯 정성을 쏟으시니라.
6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서전서문이 나의 비결(秘訣)이니라.” 하시니라.
(道典 6:45)
서전서문 심법 공부의 역사의식
1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큰 운수를 받으려는 자는 서전서문(書傳序文)을 많이 읽으라.” 하시고
2 “서전서문 가운데 이 구절은 천지에 청수를 떠 놓고 읽을 만한 글이니라.” 하시니 이러하니라.
3 且生於數千載之下하여
차생어수천재지하
而欲講明於數千載之前하니 亦已難矣라
이욕강명어수천재지전 역이난의
더구나 수천 년 뒤에 태어나
수천 년 전의 것을 밝히려 하니
또한 심히 어려운 일이로다.
(道典 8:111)
서전서문 심법 공부
10 (어천하시기 하루 전날 23일에 )다시 경석에게 명하시어 “치복을 부르라.” 하시니 치복이 약방 안으로 들어가 문 옆에 서서 명을 기다리거늘
11 상제님께서 아무 말씀도 없이 벽을 향해 누우신 채로 다만 왼쪽 손바닥을 펴 보이시는데
12 書傳序文 萬讀 致福
서전서문 만독 치복
이라 쓰여 있는지라
13 치복이 그 글을 마음에 새기니 상제님께서 나가라는 손짓을 하시거늘 곧 밖으로 물러나니라.
(道典 10:43)
[본 문]
도전의 측주에는 서전 서문에 대하여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세상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도리와 심법의 정수가 요약되어 있다.
-- 이제삼왕의 도(道)와 율령(律令)과 정법(政法)과 규율(規律)의 근원을 밝혀 실행(實行)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마음을 닦는 요체를 담은 글이다.
상제님 신앙인으로서 서전서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주문처럼 읽었기에 많은 분들이 암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상제님은 돌아가시기 하루전날, 이치복 성도를 불러들여서 왼쪽 손바닥에 서전서문 만독 치복 書傳序文 萬讀 致福 이라 쓰신 글귀를 보도록 하셨습니다. 천지공사를 마치시고 어천하시기 하루전날에 행하신 이 공사 의식에는 천지공사의 결론과 같은 그 무엇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치복致福 이란 복이 내 몸에 이른다는 뜻인데, 모든 사람이 희구하는 인생의 대복을 받으려는 자는 서전서문을 만 번 읽어서, 거기에 담긴 깊은 의미를 깨치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상제님은 “나의 조정(朝廷)에 설 사람은 서전서문(書傳序文)을 많이 읽어야 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상제님 도를 가지고 치자(治者)의 위치에 나갈 사람은 반드시 서전서문에 담긴 가르침을 깨치라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서전서문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나름대로 깨달음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상제님 도의 진체(眞體)를 파악하고 계시기에 제가 더 이상 드릴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큰 틀에서 말씀 드려봅니다. 서전 서문에는 정일집중과 건중건극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저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많은 선배 후배 성도님들의 밝은 가르침을 구합니다. 제가 서전서문을 읽으면서 깨달은 작은 가르침이 몇 개 있으나 우선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소자출을 밝히라는 불지형체의 공부를 하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제님은 “너는 삭발하고 중이 되라. 불지양생(佛之養生)이니 불(佛)로써 깨치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상제님은 불지형체와 불지양생이라는 말씀을 하셨는 바. 이것은 천후님의 다음 말씀과도 연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8 선천에서 지금까지는 금수대도술(禽獸大道術)이요
지금부터 후천은 지심대도술(知心大道術)이니라.
9 피차 마음을 알아야 인화(人和) 극락 아닐쏘냐.
10 마음 닦는 공부이니 심통(心通) 공부 어서 하라.
제가 제 심통도 못하고 무엇을 한단 말이더냐.
11 불(佛)은 선(仙)의 밑자리니라.
(道典 11:250)
상제님은 김호연 성도의 첫 월경을 받아서 행하신 소위 선매숭자 공사에서 쓰신 글에는 불지형체佛之形體 선지조화仙之造化 유지범절儒之凡節 이라는 순서로 쓰여 있습니다. 즉 유뷸선도 아니고 선불유도 아니고 불선유 라는 순서라는 말씀이지요. 또 다른 상제님 말씀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12 “나의 일은 불지형체(佛之形體) 선지조화(仙之造化) 유지범절(儒之凡節)이라야 옳게 가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10:39)
저는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모릅니다. 다만 상제님께서는 선천, 유, 불, 선 삼도의 기운을 뽑으셔서 하나로 통일된, 다시 말씀드려서 관왕冠旺된 대도를 세우시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 그 밑자리로 생각하신 것이 불佛의 마음 닦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인간사회에서 예의범절을 따지고, 사물에 통하여 온갖 조화를 부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삶에 용(用)하는 것이지만, 그 근본은 바로 자기 마음을 어떻게 닦았고, 자기 마음을 어떻게 컨트롤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에 기초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도에는 유, 불, 선 혹은 선, 불, 유 3도의 정수가 녹아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살펴보면 불의 정신이 밑바탕에 강하게 흐르고 있음을 파악하게 됩니다. 상제님은 불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남조선 배도수 공사를 보실 때, 방안에다가 중의 옷을 걸어놓으신 공사나, 천지공사를 마치시던 1909년 4월에 보신 불가지 공사 등에서 상제님은 미륵불로 오신 하느님, 옥황상제이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상제님의 일평생 삶을 되돌아봅니다. 상제님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옥황상제이셨건만 정작 이 땅에 오셔서 당신님이 소유하신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어떤 분은 상제님이야말로 우주의 조화권을 다 가지고 계셨기에, 그런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이냐고 말 하실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상제님의 삶을 생각하면 가끔 눈물이 납니다. 상제님은 행복한 가정과 부모형제자식들에게서 누리는 천륜의 기쁨도 없었습니다. 당신님의 집도 없었습니다. 고작 있는 것이라고는 김준상 성도의 방 한 칸을 얻어서 인류를 구원하는 약방을 세우신 것이 당신님 재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제님은 한마디로 집도 절도 없으셨던 분입니다.
제가 가끔 드리는 말씀이지만, 상제님은 이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시지만, 성도들에게 당신님을 내세우시면서 좋은 가마를 대령하라고 하지 않으셨고, 좋은 집을 만들어서 바치라고 안하셨고, 좋은 비단옷이나 가죽신이나, 진수성찬이나 그 어떤 물질적 사치를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상제님의 오감(五感)이 우리 보통 중생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제님도 인간이셨습니다. 그분도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제님의 삶에 대한 기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상제님의 삶은 정말로 검소한 삶이셨고, 소박한 삶이셨습니다. 상제님은 당신님이 가지신 것은 모두 불쌍한 동냥아치나 세상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이셨습니다.
저는 도전의 상제님 기록을 읽으면서 옷이 없어 헐벗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당신님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시고 나신(裸身)으로 형렬의 사랑채나 구리골 약방으로 돌아오시는 상제님을 그려봅니다. 상제님의 중생에 대한 그 지극한 마음 특히 선천 상극시대에 태어나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하는 수많은 세속 중생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의 마음, 천지부모로서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는 진실로 상제님 어진 앞에 마음을 다하여 사배심고 드리는 것입니다.
상제님은 나의 조정에 설자는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자노름이나 대두목 타령을 하지 말고 상제님의 검소하고 질박한 삶을 본받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스승의 사표가 되라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불지형체 즉 마음 닦기가 근본이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평소의 지론이 이 천지는 어느 누구도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늘과 땅은 모든 만물과 인간을 싣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한세월 어떤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사셨고, 그 이전에는 조부모님이 사셨고, 그 전에는 증조부모님이 사시다 가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강산(江山)은 우리들 것이 아닙니다. 조상님들이 사시던 곳이고, 우리가 사는 곳이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우리 자손들이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이 천지는 어느 일 개인이나 특정 성씨들의 천지가 아닙니다. 얼마 전 모 교주님은 개벽이 되면 당신님이 한 5백년 통치를 하다가 아들에게 물려주고, 다시 그 아들이 대를 이어서 자자손손 통치하는 세상을 꿈꾸다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서 개벽을 넘기고 도통을 준다고 하다가 허망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상제님은 어떤 특정 성씨를 천자 만들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 집안을 천자 귀족 황제집안을 만들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상제님은 당신님 아들도 두시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러한 상제님이 천지공사라는 지극히 공정무사한 천지 일을 결정하시면서, 선천의 모든 역사적 신명들의 공의(公議)를 들어서 공사를 결정하시면서, 어떤 특정 성씨를 천자집안 만드는 공사를 행하셨을까요? 천부당 만부당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상제님이 서전서문을 강조하신 또 다른 하나는 교단의 지도자 나아가 세상의 통치자 그룹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대한 또 다른 경책의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결코 교단의 간부가 되어서 평신도들 앞에서 높은 보직과 품계를 자랑하며 으스대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삼왕은 존자심자야요
하걸상수는 망차심자요요
태갑성왕은 곤이존차심자야라
존즉치하고 망즉란 하나니
치란지분이 고시심지존부존여하이라
--이제삼왕은 이 마음을 간직한 자요,
하의 걸과 상의 수는 이 마음을 잃은 자요
태갑과 성왕은 애써 이 마음을 간직한 자라.
간직하면 다스려지고 잃으면 어지러워지나니
다스려짐과 어지러워디는 것의 나누임이
마음을 간직하느냐 못 하느냐의 여하에 달려 있을 따름이니라.
서전서문이 이 구절에는 서경에 실려 있는 하(夏), 상(商), 주(周)의 왕조 교체에 얽힌 이야기가 배경으로 담겨 있습니다.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과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일명 수) 는 방탕하기 그지없고, 백성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는 폭군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윤의 보필을 받은 성탕과 강태공의 보필을 받은 문왕에 의해 타도되고 결국 새 왕조가 건설됩니다. (역성혁명) 상제님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문왕도수와 이윤도수를 처결하셨습니다. 문왕도수와 이윤도수의 핵심은 천자노름을 하라는 도수가 아닙니다. 못된 지도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새 틀을 짜라는 혁명도수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상제님께서 서전서문을 강조하신 것은, 단체나 모임이나 교단이나 혹은 나라에서 치자(治者) 곧 지도자 레벌에 서려는 자는 백성과 함께 여민동락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제님의 뜻은 이중성 선생의 천지개벽경에 나오는 다음의 상제님 말씀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세와 치세의 두 마음
1 禹治九年洪水할새 三過其門而不入은
우치구년홍수 삼과기문이불입
以一身之苦로 而安天下之民이니라
이일신지고 이안천하지민
우(禹)가 구년홍수를 다스릴 적에
세 차례나 자기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았음은
제 한 몸의 고달픔으로
천하의 백성을 평안케 하고자 함이었느니라.
2 是故로
시고
治世之人은 餓其體하고 勞其筋하여 以活民生하고
치세지인 아기체 노기근 이활민생
亂世之人은 淫其心하고 貪其財하여 以傷民生하나니
난세지인 음기심 탐기재 이상민생
若天理所在면 功歸於修하고 禍歸於作하리라
약천리소재 공귀어수 화귀어작
그러므로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은
제 몸을 주리고 수고스럽게 하여 백성을 살리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은
마음을 방종히 하고 재물을 탐하여 백성의 삶을 상하게 하나니
천리가 있다면 공(功)은 닦은 데로 돌아가고
화(禍)는 지은 데로 돌아갈 것이니라.
(원문 출처 이중성 천지개벽경) (2차 인용 道典 2:50)
[맺는 말]
지금 이 세상은 사람들의 인지가 너무도 발달되어 있고, 모든 것은 오픈되고 있습니다, 물론 지구촌 전체를 살펴보면 아직도 먼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상제님 진리의 본향인 우리 한국은 통신문화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상제님이 말씀하신 도통이란 것이, 뭐 꼭 앉아서 수도해서 마음을 밝히는 도통이라는것도 있지만 이미 이 세상은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통하게 하는 지심대도술의 초기단계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제님은 용력술을 배우지 말고 축지술을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인 도와 술이 아니라 이미 여동빈의 조화도술은 지금의 과학 의학 등 최첨단 기술과 산업으로 현실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상제님이 도는 어느 몇 사람을 수도해서 도통시키는 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후천의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이 밝아지는 그런 도통이지 결코 선천식으로 혼자 주문 읽고 어떤 호흡법이나 수도법으로 도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올해는 갑오(甲午)년입니다. 갑오 동학 혁명이 일어난 지 120주년 되는 의미 깊은 해입니다. 아울러 원원한 천지대운이 갑을로써 머리를 든다는 갑오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동지한식 105제의 성구 말씀대로 상제님 어천하신지 105년이 되는 의미깊은 해이고. 60갑자 중에서 전반기 30년이 끝나고 후반기 30년이 시작되는 머리가 되는 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참신앙에 올라오는 많은 글을 통하여 상제님의 도는 참동학이라는 것을 다시금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상제님은 “내내 하고 난 것이 동학(東學)이라.” 이라는 말씀을 어천 즈음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상제님이 도는 천하대란을 몰고왔던 갑오동학혁명의 참동학입니다. 이제 더 이상 불의(不義)한 상제님의 도가 세상에 판치도록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올해 갑오년에는 불같이 신앙혁명이 일어나서 모든 상제님의 일꾼들이 난법 교단에서 깨어나 참동학 상제님의 도를 바로 세우기를 고대합니다. 저도 그 일꾼 중에 한 사람이 돼서 함께 일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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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님의 댓글
농사꾼 아이피 124.♡.171.168 작성일제 눈을 틔어주는 좋은 글이군요. 감사합니다.
삼태성님의 댓글
삼태성 아이피 124.♡.171.168 작성일공감가는 글입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불가지님의 댓글
불가지 아이피 124.♡.171.168 작성일마음을 닦으라는 말씀은 다들 하십니다. 그러나 어떻게 구체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서전 서문에 마음 심자가 19자가 나오고 심법을 닦으라는 글이라고 하는 소리는 다들 들었습니다. 좋은신 의견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요. 혼자 깨치지 못하고 늘 말씀이나 동냥할려고 해서 죄송합니다.
진리구현님의 댓글
진리구현 아이피 119.♡.60.30 작성일서전서문을 많이 읽어야겠습니다. 깨우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