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글-대순전경 초판본 해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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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119.♡.137.16) 작성일13-12-11 12:29 조회7,505회 댓글0건본문
제 2 장. 선생의 유력 (第二章. 先生의 遊歷)
1. 선생께서 24세 되시던 갑오(1894)년에 고부사람 전 봉준이 당시의 악정에 분개하여 동학 신도들을 모아서 혁명(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키니 세상이 흉흉해지는지라. 선생께서 동학 농민군의 앞날이 이롭지 못할 것을 미리 아시고 “달빛 어두운 밤에 기러기 높이 나는데 오랑캐 장수 선우(匈奴族君長)는 밤을 틈타서 도망 하는구나. 날쌘 말을 탄 장수가 뒤쫓으니 큰 눈이 내리는 속에 막다른 곳에서 둘러 쌓이리라.” 라는 옛 시를 여러사람들에게 외어주시며 눈 내리는 겨울에 이르러 동학군이 패망 할 것임을 미리 알려 주시고 함부로 동학군에 들어 움직이지 말라고 가르치시더니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하여 섬멸되고 선생의 가르침에 따른 사람은 모두 화를 면하니라.
原文: 二十四歲 되시든 甲午에 古阜人 全 琫準이 當時의 惡政을 憤慨하야 東學信徒를 모아 革命을 이르키니 一世가 洶動한지라. 先生이 그 前途가 不利할 줄 아르시고 “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欲將輕騎逐 大雪滿弓刀”의 古詩를 여러사람에게 외워주사 冬期에 이르러 敗滅될 을 諷示하시며 妄動치 말라고 曉諭하섯더니 이해 겨울에 果然 東學軍이 官軍에게 剿滅되고 先生의 曉諭에 조친 者는 다 禍를 免하니라.
參考句節: 이 해에 고부인 전봉준이 동학당을 모아 병을 들어 시정을 반항하니 일세가 흉동 되는지라. 이 때에 금구인 김형렬이 선생의 성예를 듣고 와 뵈운 후 당시의 소란을 피하야 정적한 곳에 가서 함께 글읽기를 청함으로 서숙을 폐지하시고 전주군 우림면 동곡 후산 학선암에 가셨다가 그 곳도 번요함으로 물러가시다. (甑山天師公事記, 眞經 1:24)
이 해 오월 어느 날 밤에 등을 밝히지 않고 홀로 앉으사 元神을 黙運하실 새 문득 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의 古詩가 불빛 같이 밝히 보임으로 그 접구를 생각하니 곳 欲將輕騎逐 大雪滿弓刀라. 인하야 동학당이 雪期에 이르러 패망될 것을 깨달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셨더니 이해 겨울에 과연 동학당이 관군에게 敗滅되고 선생의 권유에 복종한 자는 모다 禍難을 면하니라. 선생께서 개연히 세도의 날로 그릇됨을 근심하사 광구하실 뜻을 두시기는 이해에 비롯하니라. (甑山天師公事記, 眞經 1:26)
이해 시월에 동골에 가사 동학접주(東學接主) 안 윤거(安允擧)를 방문(訪問)하시니 마침 태인 닥뱀이 안 필성(安弼成)이 한 마을에 사는 동학신도 최 두연(崔斗淵)과 함께 와서 윤거에게 도담(道談)을 듣고 있더라. 선생께서 마루에 걸터 앉으사 윤거와 더불어 성명(姓名)을 통(通)하신 뒤에 일러 가라사대 고부에서 난리가 일어나서 동학군(東學軍)이 황토마루(黃土峴)에서 승리(勝利)를 얻었으나 필경(畢竟) 패망(敗亡)을 면치 못하겠으므로 동학군의 발원지(發源地)인 이곳에 효유하러 왔노라. 그대가 접주(接主)라하니 삼가 전란(戰亂)에 참가(參加)하기를 회피(回避)하여 무고(無辜)한 생민(生民)을 전화(戰禍)에 몰아 들이지 말라. 섣달이 되면 그들이 전패(全敗)하리라 하시고 돌아가시는지라. 윤거 이 말씀을 듣고 드디어 접주를 사면(辭免)하고 전란에 참가치 아니하니 최 두연은 믿지 않고 윤거의 대(代)로 접주겸 명사장(明査長)이 되어 윤거의 부하(部下)를 인솔(引率)하고 출전(出戰)하더라.(大巡典經3版 1章15, 眞經 1:27)
필성은 두연에게서 도(道)를 받은 뒤에 남원(南原)으로 와서 종군(從軍)하라는 군령(軍令)을 받고 스무날 닥뱀이를 떠나 남원으로 향할 때 전주(全州) 구이면(九耳面) 정자리(亭子里)에 이르니 선생께서 길가에서 계시다가 필성이 이르름을 보시고 일러 가라사대 그대 올 줄을 알고 이곳에서 기다렸노니 함께 가자 하시고 필성으로 더불어 두어마장을 행(行)하여 임실(任實) 마군단 주막(酒幕)에 이르러 가라사대 날이 차니 이곳에서 쉬어 기다리라 남원에 가서 만날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리라. 필성이 가로대 여비(旅費)가 없으니 만날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곤란(困難)하겠나이다. 가라사대 밥 굶을 걱정은 하지 말라 하시더니 두어시간이 지난 뒤에 문득 방포성(放砲聲)이 나며 과연 두연이 수천 군마(軍馬)를 거느리고 지나가며 필성에게 남원으로 가지말고 전주로 따라오라 하는지라. 선생께서 필성에게 일러 가라사대 군마의 뒤를 가까이 따라감이 불가(不可)하니 천천히 가자 하시고 전주 수통목에 이르러 가라사대 오늘은 전주에서 소란(騷亂)하여 살상(殺傷)이 있으리니 이 곳에서 자고 내일 가자하시고 필성으로 더불어 수통목에서 쉬시니라. (大巡典經3版 1章16, 眞經 1:28)
이튿날 필성을 데리시고 전주에 이르사 조용한 곳에 주인(主人)을 정(定)하시고 저녁에 필성에게 일러 가라사대 거리에 나가면 볼 것이 있으리라 하시며 함께 나가사 한 곳에 이르르니 세 사람의 머리가 길 바닥에 구르는지라. 가라사대 저것을 보라. 이렇게 위험한 때에 어찌 경솔(輕率)하게 몸을 움직이리오 하시더라. 필성은 이곳에서 선생과 작별(作別)하니 라.(大巡典經3版 1章17, 眞經 1:29)
그믐께 동학대군(東學大軍)이 전주를 떠나서 경성(京城)으로 향할 때 필성이 종군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니 선생께서 길 가에 서 계시다가 필성을 불러 물어 가라사대 이제 종군하느냐 대(對)하여 가로대 그러하나이다. 가라사대 이 길이 크게 불리(不利)하리니 조심(操心)하라 하시더라. 필성은 선생을 작별(作別)하고 종군하여 진잡읍(鎭岑邑)을 지나서 유성(儒城) 장터에서 쉬고 다시 하루를 행군하여 다음날 새벽에 청주(淸州) 병영(兵營)을 진공(進攻)할 새 삼십리 가량(仮量) 미치지 못하였는데 선생께서 또 길가에 서 계시다가 필성을 불러 물어 가라사대 너의 군중(軍中)에 한 중이 있더냐 대하여 가로대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는 이길을 따르지 말라, 저희들이 요승(妖僧)의 말을 듣고 멸망(滅亡)을 당(當)하리라. 필성이 가로대 이런 중대(重大)한 일에 어찌 불길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가라사대 나의 말을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어찌 저희들을 미워함이리오. 저희들의 불리한 장래(將來)를 알므로 한 사람이라도 화를 면케하려 함이로다. 가로대 그러면 선생은 어찌 이곳까지 오셨나이까 가라사대 나는 동학에 종군하여 온 것이 아니요, 구경하러 왔노라 하시니라.(大巡典經3版 1章18, 眞經 1:30)
이때에 김 형렬(金亨烈)이 필성의 곁에 있다가 선생께서 필성과 수작(酬酌)하시는 말씀을 듣고 인사를 청하거늘 형렬에게도 종군하지 말라고 권하시는지라. 필성과 형렬은 선생의 말씀을 믿지 않고 종군하여 가다가 청주 병영 앞 산골에 이르니 좌우에서 복병(伏兵)이 일어나서 포화(砲火)를 퍼부음에 동학군에 죽는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지라. 필성과 형렬은 황겁(慌怯)하여 몸을 빼어 송림(松林)속으로 들어가니 선생께서 이곳에 계시다가 불러 가라사대 너희들은 잘 도망(逃亡)하여 왔도다. 이곳은 안전(安全)하니 안심(安心)하라 하시니 형렬은 비로소 선생의 지감(知鑑)이 비상(非常)하심을 감복(感服)하니라. 두 사람은 종일(終日) 먹지 못하여 주림을 이기지 못하거늘 선생께서 돈을 내어주시며 가라사대 저곳에 가면 떡집이 있으리니 주인이 없을지라도 떡값을 수효(數爻)대로 떡그릇 안에 두고 떡을 가져오라. 필성이 명하신대로 하여 떡을 가져오니 선생께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 먹이시니라.(大巡典經3版 1章19, 眞經 1:31)
선생께서 두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동학군이 미구(未久)에 쫓겨오리니 우리가 먼저 감이 옳으리라 하시고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실 때 진잠에 이르러 문득 가라사대 동학군이 이곳에서 또 많이 죽으리라. 두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심히 불쾌히 생각하거늘 가라사대 저희들을 미워함이 아니요, 사태(事態)의 진전(進展)될 기미(機微)를 말함이니 아무리 듣기 싫을 지라도 불쾌(不快)히 생각하지 말라 하시니라. 산중유벽(山中幽僻)한 곳에 쉬시더니 얼마 아니하여 총소리가 어지러히 일어나며 그 곳에서 격전(激戰) 끝에 동학군이 많이 사상(死傷)하니라.(大巡典經3版 1章20, 眞經 1:31)
이곳을 떠나 산길을 행하시더니 문득 목탁(木鐸)소리가 들리거늘 찾아가니 곧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더라 가라사대 해는 아직 이르나 더 가다가는 해(害)를 입으리니 이곳에서 자고 가자 하시고 쉬시더니 얼마 아니하여 한 중이 이르러 말하되 동학군이 노성(魯城)에 유진(留陣)하여 도망하는 군사(軍士)를 붙든다 하거늘 필성과 형렬이 크게 근심하니 가라사대 이곳에서 쉬자는 것은 정(正)히 이러한 화(禍)를 피(避)하려 함이라. 내일 아침에 떠나가면 아무 사고(事故)가 없으리니 염려(念慮)하지 말라 하시더라. (大巡典經3版 1章21, 眞經 1:33)
이튿날 아침에 갑사를 떠나시면서 가라사대 그대들은 이로부터 큰 화가 없으리니 각기 갈려가라 하시니 두 사람은 오히려 두려운 마음을 놓지 못하여 선생과 동행(同行)하기를 청(請)하거늘 허락(許諾)하시고 함께 여산에 이르사 가라사대 만일 읍내를 지나면 옷을 빼앗기리라 하시고 샛길로 들어 고산(高山) 인내 장터로 향(向)하시니라. 이때에 여산읍으로 지나는 동학군은 모두 읍사람에게 옷을 빼앗기고 벗은 몸으로 흩어져 가니 대개(大槪) 전번(前番)에 동학군들이 북상(北上)할 때에 읍사람들의 옷을 빼앗아 갔음을 보복(報服)함이러라.(大巡典經3版 1章22, 眞經 1:34)
이 길로 전주에 이르사 두 사람을 각기 돌려 보내실 때 필성과 형렬이 숙박비(宿泊費)가 없음을 걱정하거늘 가라사대 내가 이곳에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돌아가라 하기거늘 이에 선생께 작별하고 형렬은 구릿골로 필성은 닥뱀이로 각기 돌아갔더니 이 뒤에 동학 전군(全軍)이 도망해 와서 섣달 열사흗날 원평(院坪) 접전(接戰)과 보름달 태인 접전으로 연전연패(連戰連敗)하여 산망(散亡)하여 버리니라.(大巡典經3版 1章23, 眞經 1:35)
- 해설에 앞서 알림
푸른글이 타인의 저작에서 인용하는 인용문은 증산상제님을 신앙하는 이들에게는 존칭없는 호칭이 아주 거북하게 여겨지더라도 원저자의 글 그대로 소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있다. 그것은 타인의 글에 한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자꾸 손대고 싶은 유혹을 참기 어렵기 때문이지 푸른글이 증산 상제님을 그렇게 호칭하고 있다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
해설 : 증산이 인용하고 있는 한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학계나 교계에서 전혀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연구되어 본 적이 없다. 다만 증산교단 내부에서 증산이 인용한 한시가 증산이 행했던 天地公事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지니고 있다는 교리적 해석에 이용하는 정도였을 따름이다. 따라서 증산이 인용한 한시 자체가 증산교인들에게는 매우 신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다양한 풀이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신앙이 유발되기도 했던 실정이다. 그러나 증산이 인용한 漢詩들은 어디까지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시이며, 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증산교인들의 믿음과는 별개의 영역에 있다. 증산이라는 인물이 과연 어떠한 생각을 했으며,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증산이 인용한 한시를 연구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증산이 인용한 한시를 찾아보면서 우리는 증산이 어떤 책을 읽었으며, 그가 어떤 의도에서 그 시를 인용하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ꡔ대순전경ꡕ에는 증산이 “옛 글” 혹은 “古詩”라고 명확히 언급하면서 종도들에게 외워준 글이 몇 편 있다. 증산은 자신이 지은 글은 직접 지었다고 말하거나, 천지공사를 행하는 과정에 글로 써서 신비하게 사용했다. 따라서 “옛 글”이나 “古詩”라고 증산이 밝힌 글들은 典據가 있음에 틀림없다.
ꡔ대순전경ꡕ에서 증산이 “옛 글”이라고 밝힌 글은 1장 14절, 3장 39절, 3장 40절, 3장 141절, 3장 169절, 3장 171절, 3장 175절, 3장 176절, 3장 177절, 4장 161절, 9장 21절 등에 기록된 글로서 모두 11편이다. 그리고 “古詩”라고 증산이 밝히고 있는 글은 3장 28절, 3장 182절, 3장 204절 등에 있는 글로서 모두 3편이다. 한편 3장 203절에는 鳥兒詩와 猫詩라고 증산이 시의 제목을 밝혀준 2편의 시가 있으며, 9장 21절에는 南原 楊蓬萊의 自挽詩라고 밝힌 시를 종도들에게 외워주고 있다. 그리고 증산은 ꡔ현무경ꡕ에서 武夷九曲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朱子가 지은 시이다. 따라서 이들을 모두 합한 18편의 시는 모두 그 전거가 분명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증산은 “글 한귀를 전하여”, “글 한 수를 외우시니”, “ ---를 외우시니라.” 등의 표현으로 기술된 漢詩 귀절을 종도들에게 외워주기도 했다. 이들은 ꡔ대순전경ꡕ 2장 26절, 3장 6절, 3장 29절, 3장 172절, 3장 174절, 4장 17절, 4장 27절, 4장 39절, 4장 113절, 4장 148절, 8장 10절, 9장 1절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모두 12편이다. 물론 이12편이라는 숫자는 증산이 지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한시도 포함한 수치이다. 그러나 일단 증산이 짓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필자에 의해 2장 26절에 있는 한시 귀절의 전거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결국 증산이 ꡔ대순전경ꡕ에서 종도들에게 일러주고 있는 한시는 최소한 17편 최대한 30편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동양문화권에서 전해져 오고 있는 수십만수의 한시 가운데서 이들 한시의 전거를 찾는 일은, 작자. 저작년대. 인용서적 등이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필자가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찾아보았지만, 결국 일부분의 한시만 그 전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詩가 갖는 함축적인 의미와 상징적인 표현들에 착안하여, 상당수의 증산교인들은 증산이 이들 한시 속에 천지공사가 전개될 방향과 내용들을 秘藏시켜 놓았다고 믿었으며 현재에도 그러하다. 따라서 이들 한시의 전거를 찾고, 그 시가 지어진 배경과 작자의 신분이나 처했던 상황 등을 살펴보는 일은 증산의 천지공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작업이다. 그러면 이제 필자가 지금까지 찾을 수 있었던 전거들을 ꡔ대순전경ꡕ의 관련내용과 연결하여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아직 필자가 그 전거를 찾을 수 없었던 많은 한시들은, 앞으로 좀더 노력하는 후대의 연구자에게 과제로 맡길 수밖에 없다.
이 시는 盧 綸의 「和張僕射塞下曲」이고 전문은 다음과 같다.
月黑雁飛高 달빛이 어두운데도 기러기들은 (어디론가) 높이 날아가고
單于遠遁逃 흉노의 추장은 (어두운 밤을 틈 타) 멀리 도망쳐 숨어버렸다네
欲將輕騎逐 날쌘 말을 타고서 뒤쫓아 가고싶으나
大雪滿弓刀 눈이 흠뻑 내려 활과 칼을 덮어 버렸네
위의 시는 唐代의 시인인 盧 綸이 지은 「和張僕射塞下曲」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한편 이 시는 같은 제목으로 錢 起의 시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錢 起의 시라고 기록되어 있는 시는 위의 인용문뿐이다. 그러나 盧 綸의 시로 기록된 곳에는 모두 4구의 연작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塞下曲」이란 “邊塞(변방의 요새)에서의 전투를 노래한 것”이다. 시의 제목에 나오듯이 작자보다 앞서 새하곡을 지은 張僕射는 張연賞이란 사람이다. 즉 이 시는 장연상이 지은 「새하곡」에 작자인 노륜이 唱和한 시이다. 이 시는 전체가 律에 맞으며, 下平聲四 豪韻을 썼고 韻脚은 高, 逃, 刀이다. 전체적으로 장군이 병사를 이끌고 적을 추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시이다. 首句는 기후의 나쁨을 노래했고, 次句는 적군이 밤을 틈타 도망함을 표현했고, 제 3구는 장군이 馬隊를 이끌고 추격함을 적었고, 제 4구는 首句와 호응하여 돌아올 때에 활과 칼 위에 가득히 눈이 쌓인 邊塞, 苦寒의 경치를 읊었다. 증산이 동학패망을 예언했다는 시는 ꡔ全唐詩ꡕ에 수록된 시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증산은 어떤 형태로든지 ꡔ전당시ꡕ를 보았었음에 틀림없다. ꡔ전당시ꡕ에 수록된 무려 16만여수의 한시를 증산이 전부 보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축약된 형태의 ꡔ전당시ꡕ 選集은 그의 청년기에 이미 보았음이 분명하다. 결국 증산은 노 륜의 시를 한 글자의 착오도 없이 정확하게 외우고 있을 정도로 唐詩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지녔던 인물이다.
한편 증산이 이 시로써 동학의 패망을 예언했다는 것은 여러 관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증산은 동학운동을 부정적으로 평했다. 왜냐하면 국경을 지키는 장수가 오랑캐를 쫓아가 패멸시키는 심정을 노래한 귀절을 인용하여 동학이 정부측의 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둘째, 증산은 반란군과 대항군의 전투로 동학운동의 전개과정을 밝혀주었다. 장군, 말, 활, 칼등의 詩語가 들어있는 한시를 인용하여 증산은 종교운동인 동학이 무기를 들고 시세를 바꾸어보려는 전투로 발전될 것임을 미리 말해주었던 것이다. 셋째, 동학운동이 겨울에 이르러 사그러들 것을 예언했다. 기러기, 눈 등의 시어를 사용한 시를 인용하여 겨울이 되면 동학운동이 쇠진해 질 것을 미리 말했다. <김 탁 / 甑山 姜一淳이 인용한 漢詩 硏究>
註解: 1894년 7월 어느 날 밤 명상에 드셨다가 天地의 元神이 黙運하시어 나타난 古詩를 환하게 보시고 모든 사람에게 東學軍이 눈 내리는 시기에 패할 것을 미리 알려 주시며 모든 사람에게 東學軍에 들지 말 것을 권유하시고 10월 泰仁 동골에 사는 東學接主 安 允擧의 집에서 道談을 나누던 安 允擧, 安 弼成, 崔 斗淵등에게 섣달에 동학군이 패망할것임을 미리 말씀하시니 允擧는 이 말씀을 믿어 接主를 사퇴하고 전란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斗淵은 믿지 않고 接主겸 明査長이 되어 出戰하고 斗淵을 따라 出戰하여 남원으로 가던 安 弼成앞에 나타나셔서 함께 동행하시며 弼成에게 從軍을 만류하시고 殺傷을 피하여 全州 수통목에서 쉬시게 하시니 이때 金 亨烈이 弼成의 곁에서 先生께서 弼成과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를 청하니 先生께서 亨烈에게도 역시 從軍을 만류하시니라. 그 후 두 사람이 先生의 말씀을 듣지 않고 從軍하여 淸州兵營 앞 산골에서 복병을 만나 死地에 빠졌을 때 선생께서 金 亨烈과 安 弼成 두 사람을 구해내시고 이 因緣으로 나중에 두 사람이 모두 先生을 모시고 따르게 되니라.
關聯文獻: 典經 行錄1章21,23/ 道典 1篇22,23,24,25,26/ 眞經 1:24,26,27,28,29,30,31,32/ 大巡典經解說 1장14,16,19,22,23/ 大巡典經3版 1章14
2. 갑오동학농민전쟁 이후로 나라의 정치는 더욱 부패해지고 세상의 인심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며 권력을 쥔 자들은 더욱 횡포하고 잔학해져서 재물을 억지로 강탈하는 것을 일삼으나 유교는 허례허식만 숭상하고 불교는 혹세무민에만 힘쓰며 동학은 혁명 실패 후 그 기세가 꺾여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기독교(舊敎)는 이 틈을 타서 세력을 신장하는 데만 온 힘을 기울이니 민중들은 도탄에 빠져 마음을 편히 가지지 못하고 귀의 할 곳을 찾지 못하여 불안과 두려움이 사회 곳곳마다 엄습하거늘 선생이 널리 천하를 구하실 뜻을 품으시고 유교, 불교, 선교, 음양참위의 모든 책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깊이 깊이 읽으신 후에 세상인심을 두루 살피시고 체험하시기 위하여 정유(1897)년부터 길을 떠나시어 여러 곳을 두루 다니시니라.
原文: 以後로 國政은 더욱 腐敗하고 世俗은 날로 惡化하야 官憲은 오직 貪贓殘虐을 일삼으며 儒者는 虛禮만 崇尙하고 佛徒는 誣惑만 힘쓰며 東學은 刦難을 經한 後로 萎靡를 極하야 거의 形跡을 거두게 되고 西敎(基督敎 新,舊敎)는 勢力을 伸張하기에 盡力하니 民衆은 苦窮에 져 安堵의 길을 엇지 못하고 四圍의 眩惑에 싸히여 歸依할 바를 아지 못하야 危惧와 不安이 全社會에 襲來하거늘 先生이 慨然히 匡救의 을 품으사 儒,佛,仙 陰陽讖緯의 書籍을 通讀하시고 다시 世態 人情을 體驗하시기 爲하야 丁酉로부터 遊歷의 길을 나시니라.
參考句節: 先生께서 全州 所陽面 松廣寺에 여러 날 동안 계실 때 중들이 先生께 無禮하게 대접하니 꾸짖으시기를 “요망한 무리들이 산 속에 모여 佛法을 빙자하여 惑世誣民하고 世間에 害毒을 끼치니 이 소굴을 뜯어 버리리라.” 하시며 法堂 기둥을 손으로 잡아당기시니 기둥이 한 자나 물러나니 그제서야 온 중들이 달려와서 謝罪하므로 그치시니 그 후에 물러난 法堂 기둥을 원상대로 回復하려고 여러번 修理하였으나 물러난 기둥이 회복되지 아니하니라. (眞經 1:37, 典經 行錄1章19, 大巡典經解說 大巡典經3版 1章25) - 1979년 푸른글이 상제님의 유적지인 이 곳을 찾아 답사할 당시는 대웅전 법당기둥이 한 자정도 물러나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사진으로 찍어둔 바 있으나 애석하게도 그 사진은 몇 번의 이사로 다른 자료와 함께 분실하여 이곳에 올리지 못한다.
이 뒤에 전주에 가사 백 남신(白南信)의 아우의 소실(少室)인 기생(妓生)의 친가(親家)에 사관(舍舘)을 정하시고 오랫동안 머무르시더니 그 기생이 선생의 우아(優雅)하신 의표(儀表)를 탐(貪)내어 하루는 밤을 타서 선생께서 거처(居處)하신 방으로 들어오거늘 선생께서 꾸짖어 보내셨더니 그 뒤에 다시 수차(數次) 들어오거늘 여전(如前)히 개유(開諭)하사 돌려 보내시니라.(大巡典經3版 1章26, 眞經 1:38)
先生께서 스물다섯 되시던 乙未(1895)年 봄에 古阜地方 儒生들이 平亂을 축하하는 뜻으로 斗升山에 모여 詩會를 열었을 때 先生께서도 參與하셨더니 한 老人이 先生을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작은 책 한 권을 傳하니 先生께서 그 책을 通讀하시니라.(眞經 1:36, 典經 行錄1章24, 大巡典經解說 大巡典經3版 1章24)
정유(1897)년 초에 이르러 다시 정남기(정씨 부인의 처남) 집에 서숙을 설하시고 아우 영학과 형렬의 자 찬문과 그 이웃 학도를 가르치시다. 이때 정씨의 소장한 유선불 음양참위의 서적을 통독하신 후 왈 이것이 천하를 광구 함에 일조가 되리라 하시고 품으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에 서숙을 폐하시고 인심과 속정을 살피시려고 사방에 주유하시기로 발심하시고 길을 떠나시다. 그날 밤에 익산군 이리에 이르사 행자가 없음으로 부득이 복서명리로써 행자를 구하시다. (甑山天師公事記, 眞經 1:39)
關聯文獻: 典經 行錄2章1,2/ 道典 1篇28,29/ 眞經 1:40/ 甑山敎 1章27
3. 충청도 연산에 가셨을 때 역학자 김 일부에게 들리시니 이때 일부는 어느날 꿈에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서 증산선생과 함께 천상옥경에 올라오라는 상제(上帝)의 명을 전하므로 일부가 선생과 함께 천상에 올라 요운전이라는 액자가 걸린 화려한 궁궐에 들어가 상제를 뵈오니 상제께서 선생이 널리 세상을 구하려 하시는 뜻을 치하하며 매우 우대하는지라. 일부가 이상히 여기는데 선생이 오셨으므로 이 꿈을 말씀드린후에 요운이라는 호(號)를 선생께 드리고 매우 공경 하니라.
原文: 忠淸道 連山에 이르사 易學者 金 一夫에게 들니시니 이에 一夫의 에 하눌로부터 天使가 나려와서 姜士玉과 함 玉京에 올나오라는 上帝의 命을 傳하거늘 一夫가 先生과 함 天使를 라서 玉京에 올나가 曜雲殿이라 題額한 壯麗한 金闕에 드러가 上帝 謁見하니 上帝- 先生에게 對하야 匡救天下하려는 을 賞讚하며 極히 優遇하는지라. 一夫 - 크게 異常히 녁여 이 을 말한 後에 曜雲이라는 道號를 先生 드리고 甚히 敬待하니라.
參考句節: 이곳으로 부터 충청남도 강경을 지나서 공주에 이르사 향적산 김일부의 영가무도의 교법을 관찰하셨는데 이 때 일부의 꿈에 하늘로서 사자가 내려와 강사옥과 함께 옥경에 올라오라는 상제의 명을 전달함으로 선생을 모시고 옥경에 올라가니 주루금궐이 높이 솟았고 요운전이라 제액 하였으며 사자를 따라 전내에 들어가서 상제께 뵈우니 상제가 선생께 대하야 광구천하의 뜻을 상찬하며 매우 우대 하셨다 하니라. 김일부는 이로써 선생을 기이히 생각하야 이 꿈을 말한 후 요운이란 호를 선생께 들인 일이 있느니라. 수일을 머무신 후 行資가 없어서 大通橋에 이르시어 한 서숙에 들리어 명리를 판단하시니 그 성명이 공주 부중에 선전되야 명을 묻는 사람이 많이 몰려와 그 신이한 판단에 경복하더라. 또 팔월 십오일의 佳節을 당하여 모든 사람이 소를 잡아서 선생을 공양하니라. 그 후로 경기, 황해, 강원, 평안, 함경, 경상, 각지로 유력하시니라. (편자 = 우 각지로 유력하시든 때의 이적은 미상함으로 후일에 수집하기로 하고 고궐함) (甑山天師公事記, 眞經 1:41,42)
解說: 충청남도 연산 향적산에서 김 일부(諱는恒, 字는道心, 號는一夫, 1826-1898)가 先天時代의 易인 伏羲八卦[河圖], 文王八卦[洛書]에서 相克이 사라진 後天世界를 나타낸 正易을 밝혀내고 영가무도(詠歌舞蹈)의 敎法을 門徒에게 펼치고 있던 중 어느날 꿈에 上帝님의 명을 받은 天使를 따라 요운전이라 이름한 금궐에 들어가 상제님을 뵙고 내려왔는데 그 다음날 甑山先生께서 오시니 그 모습이 전날 꿈에 뵈었던 상제님의 모습이라. 이에 先生께 曜雲이라는 도호를 드리고 매우 공경하니라. 典經, 大巡典經에는 “함께 올라오라 - 우대하는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고 道典과 眞經에는 “뵙고내려 왔는데 - 모습이 상제님과 같은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註解: 九天은 泥丸天,雙丹天,流珠天,明堂天,神聖大帝天,天庭天,極眞天,玄丹天,太皇天을 말하며 玉京은 玉山上京 金闕玅庭에서 由來한 글이다. 正易은 별첨을 참조.
關聯文獻: 典經 行錄2章2/ 道典 1篇8,29/ 眞經 1:41/ 大巡典經解說 1章28/ 大巡典經3版 1章28/ 正易硏究(李 正浩 著,국제대학 출판부,1976)/ 正易과 韓國(朴 相和 著,경인문화사,1985)
4. 이 길로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각지를 유력하시며 민심과 풍속을 살펴보시니 선생의 학식과 견문이 더욱 깊고 넓어 지셔서 가는 곳마다 신인(神人)이란 칭송를 들으시니라.
原文: 이 길로 京畿, 黃海, 江原, 平安, 咸鏡, 慶尙各地를 轉轉遊歷하시니 先生의 慧識은 博學과 廣覽을 라 더욱 明澈하여지심으로 이르는 곳마다 神人이라는 稱頌이 놉흐니라.
參考句節: 그 후 전주부에 이르시니 府中사람들이 神人으로 여기시니라. 그 때 어떤 사 람이 妓女 금희 향춘 姉妹를 자기의 두 딸이라 속이고 命을 묻거늘 선생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왜 나를 속이느뇨” 하셨으나 그 사람이 바른대로 고하지 아니함으로 선생께서 가라사대 “이것은 娼妓의 命이라. 그대가 이러한 딸들을 두었으니 賤人이로다” 하시니 그 사람이 탄복하고 부끄러워하니라. 삼년을 주유 하시다가 更子年에 고향에 돌아오시어 시루산에 祖母의 묘를 緬禮 하시니라.(甑山天師公事記, 眞經 1:45)
關聯文獻: 典經 行錄2章3/ 道典 1篇30/ 眞經 1:44/ 大巡典經3版 1章29
5. 이렇게 수 년간을 두루 세상을 유력 하시다가 30세 되시던 경자(1900)년에 고향으로 돌아 오시더니 이때에 전주 이동면 전룡리에 사는 이 치안이 아들의 혼담을 위해 충청도로 향하다가 주막에서 선생을 만나 서로 인사도 없이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그 다음날 떠나려 할 적에 선생께서 치안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혼사를 위해 길을 떠났으나 반드시 헛 일이 되리니 이 길을 가지말고 오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전부터 혼사를 말해오던 곳에서 매파를 보내와서 청혼을 하여 혼인이 성사 되리라. 만일 이 기회를 잃으면 다시 혼인길이 열리기 어려우니 빨리 돌아가라.” 하시거늘 치안이 선생께서 자신의 일을 상세히 알고 말씀하시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여 비로소 선생과 인사를 나누고 선생의 계시는 곳을 상세하게 물은 후 집으로 돌아가니 과연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라.
原文: 이러케 數年동안을 遊歷하시다가 庚子에 故鄕으로 도라오시더니 이에 全州 伊東面 田龍里 李 治安이 求婚次로 忠淸道를 向하다가 旅舍에서 先生을 만나 一夜를 同宿하고 翌日 臨發에 先生이 治安다려 일너 가라사대 그대가 이제 求婚次로 길을 낫스나 반다시 虛行이 될 것이니 이 길을 가지 말고 다시 집으로 도라가라. 그러면 前日부터 議婚하여 오든 곳에서 君家에 媒介를 보내여 完約을 求하리라. 만일 이 機會를 일흐면 婚路가 열니기 어려우리니 니 도라가라 하시거늘 治安이 先生서 自己의 事情을 알고 말삼하심을 神奇히 녁여 비로소 姓名을 通하고 先生의 住所를 자세히 무른 後에 곳 그 길을 가지 안코 집으로 도라오니 果然 말삼하신 바와 갓흐니라.
關聯文獻: 典經 敎運1章11/ 道典 1篇31/ 眞經 1:46/ 大巡典經3版 1章30
6. 혼사 일이 있은 이후로 이 치안이 선생의 신성하심을 흠모하여 자기집으로 선생을 모셔 왔더니 그때 치안의 아들 직부는 마을 이장으로 갑자기 마을인구를 조사할 일로 매우 고민하는지라. 선생께서 주산으로 셈하신 후에 호수와 남녀 인구수를 자세히 일러주시고 삼일내에 한 사람이 줄어들 것임을 말씀하시거늘 직부는 믿지 않고 온 마을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조사해보니 과연 한 호수 한 사람의 차이도 없고 또 삼일만에 한 사람이 사망하므로 이로부터 비로소 직부가 선생의 신성하심을 진심으로 느끼고 따르니라.
原文: 이 後로 治安이 先生의 神異하심을 欽慕하야 自家로 延聘 하엿더니 마참 里中人口 를 緊急히 調査할 일이 잇서 治安의子 直夫가 甚히 苦心하는지라. 先生이 籌를 取하야 演算하신 後에 戶數와 男女 人口數를 자세히 일너주시고 三日內에 一口가 損할 것을 말삼하시거늘 直夫는 밋지 안니하고 드대여 里中을 도라 一一히 精査한즉 果然 一戶 一口의 差錯이 업고 한 三日內에 一口가 死亡하는지라. 이에 直夫가 비로소 驚異하야 그 神異하심을 感服하니라.
參考句節: 경자에 북도로부터 돌아와 김제 반월리 김준희의 집에 머무시다가 전주 이동면 전룡리 이직부의 집에 옮아가시니 이는 직부의 부가 연빙 함이러라. 그 집 훈장 안모가 선생에게 향하야 시재하심을 청함으로 선생께서 주를 갖고 산두사 그 동리 호수와 남구여구의 수를 상언하시며 삼일내에 일구가 손하리라 하시니 안모와 이직부가 이상히 여겨 그 동내 호구를 조사한 즉 일호일구의 차착도 업고 삼일 내에 과연 일인이 사망하니라. (甑山天師公事記)
그 후 이직부를 데리고 전주부에 들어가시다가 한사람이 황망히 가는 것을 보시고 그 사람 다려 집으로 돌아가라 하시니 그가 괴상히 여겨 연유를 묻거늘 천사 왈 그대가 혼사로 인하야 매개를 찾아가지마는 그 매개는 방금 그대의 집에 가서 기다리는 중이니 그대의 이 길은 허행일 뿐 아니라 만일 오늘에 매개를 만나서 완약하지 못하면 그 일은 귀허되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매우 경탄하야 명하신 대로 가든 길을 중지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과연 매개가 와서 가다리니라. 그 후에 그 사람이 선생을 찾아와서 크게 감복 하니라. (甑山天師公事記)
關聯文獻: 典經 權智1章14/ 道典 1篇33/ 眞經 1:47/ 大巡典經3版 1章31
* 정역(正易)에서 일부 발췌(정역 전체는 푸른글이 앞서 올려둔 첨부자료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十五一言
嗚呼라. 盤古化하시니 天皇无爲시고 地皇載德하시니 人皇作이로다. 有巢旣巢하시고 燧人乃燧로다. 神哉伏羲劃結하시고 聖哉神農耕市로다. 黃帝甲子星斗요 神堯日月甲辰이로다. 帝舜七政玉衡이요 大禹九疇玄龜로다. 殷廟에 可以觀德이요, 箕聖乃聖이시니 周德在玆하야 二南七月이로다. 麟兮我聖이어 乾坤中立하사 上律下襲하시니 襲于今日이로다.
嗚呼라. 今日 今日이여. 六十三 七十二 八十一은 一乎一夫로다. 擧便无極이니 十이니라. 十便是太極이니 一이니라. 一이 无十이면 无體요, 十이 无一이면 无用이니 合하면 土라. 居中이 五니 皇極이니라. 地는 載天而方正하니 體니라. 天은 包地而圓環하니 影이니라. 大哉라. 體影之道여. 理氣囿焉하고 神明萃焉이니라. 天地之理는 三元이니라.
(오랜 세월이 흘러 오늘날 이 시점에 이르러 영원한 내일을 향한 오늘에 乾之策 一을 맡은 사람이 一夫로다. 들면 곧 无極이니 十이고, 十은 곧 太極이니 一이다. 一은 十이 없으면 體가 없고 十은 一이 없으면 用이 없으니, 이것을 합한 것이 土이고 가운데 五가 자리하니 皇極이다. 땅은 하늘을 이고 方正하니 體이며 하늘은 땅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으니 影[用]이다. 크구나 體影의 道여, 理氣가 이 속에 가득 차 있고 모든 神明이 여기 모여 있구나. 천지의 이치는 太極 无極 皇極의 三元이니라.)
주) 天數(乾之策 63+72+81=216) 地數(坤之策 144) 乾은 天이며 太極이며 一이다.
元降聖人하시고 示之神物하시니 乃圖乃書니라. 圖書之理는 后天 先天이요 天地之道는 旣濟未濟니라. 龍圖는 未濟之象而倒生逆成하니 先天 太極이니라. 龜書는 旣濟之數而逆生倒成하니 后天 无極이니라. 五居中位하니 皇極이니라. (먼저 聖人이 나타나시고 하늘이 신묘한 물증을 보이니 그것이 河圖와 洛書라. 하도와 낙서의 이치는 후천과 선천이요, 천지의 도는 旣濟未濟이니라. 河圖(龍圖)는 55點으로 十數가 전부 들어있으니 后天數(陰)이며 洛書(龜書)는 45點으로 九數에 그쳤으니 先天數(陽)요, 伏羲 八卦는 八數에 그쳤으니 未濟의 數로 倒로 生하고 逆으로 成하니 선천 太極이요, 文王八卦는 九數에 그쳤으니 陽數는 다했으나 十이 없음으로 旣濟의 數로 逆으로 生하고 倒로 成하니 후천 无極이라. 五는 하도와 낙서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니 皇極이다.)
易은 逆也니 極則反하느니라. 土極하면 生水하고 水極하면 生火하고 火極하면 生金하고 金極하면 生木하고 木極하면 生土하니 土而生火하느니라. 金火互宅은 倒逆之理니라. (易이란 克하는 것이니 극에 이르면 반전한다. 예를 들어 물을 분해한 수소와 산소를 태우면 불이 생기는 것과 같이 물에서 불이 생기니 土가 極하면 生水하고 水가 極하면 生火하고 火가 極하면 生金하고 金이 極하면 生木하고 木이 極하면 生土하니 土는 火를 生한다. 그러므로 金과 火가 서로 자리를 바꿈은 倒와 逆의 이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嗚呼至矣哉라. 无極之无極이여. 夫子之不言이시니라. 不言而信은 夫子之道시니라. 晩而喜之하사 十而翼之하시고 一而貫之하시니 儘我萬世師이시니라. (아아 지극하도다. 태극 형성 이전의 无極이시여. 이것은 孔子가 말씀하지 않으신 것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믿으신 것은 공자의 道이다. 孔子께서 晩年에 易을 좋아하여 十으로 날개를 하고 一로 이것을 꿰뚫으셨으니 참으로 만세의 스승이시다.)
金火五頌
嗚呼라, 金火互易은 不易正易이니 晦朔弦望進退屈伸律呂度數造化功用이 立이라. 聖人所不言이시니 豈一夫敢言이리오마는 時요, 命이시니라. 嗚呼라, 日月之德이여. 天地之分이니 分을 積十五하면 刻이요, 刻을 積八하면 時요, 時를 積十二하면 日이요, 日을 積三十하면 月이요, 月을 積十二하면 朞니라. 朞는 生月하고 月은 生日하고 日은 生時 하고 時는 生刻하고 刻은 生分하고 分은 生空하니 空은 无位니라. 堯舜之朞는 三百六十五度 四分度之一이라. 一夫之朞는 三百七十五度이니 十五를 尊空하면 正吾夫子之朞로 當朞 三百六十日이니라. 五度而月魂生申하니 初三日이요, 月弦上亥하니 初八日이요, 月魄成午하여 十五日望이니 先天이고 月分于戌하니 十六日이요, 月弦下巳하니 二十三日이요, 月窟于辰하니 二十八日이요, 月復于子하니 三十日이 晦니 后天이니라. 月谷中宮之中位하니 一日이 朔이니라. 六水九金은 會而潤而律이고 二火三木은 分而影而呂니라.
一歲周天律呂度數
(一歲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黃道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이며 後天에는 그것이 三百六十日임을 正易이 말한다.)
分은 一萬二千九百六十이니라. 刻은 八百六十四니라. 時는 一百八이니라. 日은 十九니라. 理會本原은 原是性이라. 乾坤天地는 雷風中을 歲甲申六月二十六日戊戌에 校正書頌하노라. 水土之成道가 天地요, 天地之合德이 日月이니라. 太陽恒常은 性全理直이니라.太陰消長은 數盈氣虛니라. 盈虛는 氣也니 先天이며 消長은 理也니 后天이니라. 后天之道는 屈伸이요, 先天之政은 進退니라. 進退之政은 月盈而月虛이며 屈伸之道는 月消而月長이니라. 抑陰尊陽은 先天心法之學이나 調陽律陰은 后天性理之道니라. 天地도 匪日月이면 空殼이요, 日月도 匪知人이면 虛影이니라. 潮汐之理는 一六壬癸水位北하고 二七丙丁火가 宮南하여 火氣는 炎上하고 水性은 就下하여 互相衝激하며 互相進退而隋時候氣節은 日月之政이니라. 嗚呼라, 日月之政이여. 至神至明하니 書不盡言이로다. 嗚呼라, 天何言哉시며 地何言哉시리오마는 一夫能言하노라. 一夫能言兮여, 水潮南天하고 水汐北地로다. 水汐北地兮여, 早暮를 難瓣이로다. 水火는 旣濟이나 火水는 未濟로다. 大道從天兮여, 天不言이랴. 大德從地兮여 地從言이로다. 天一壬水이니 萬折必東이로다. 地一子水여, 萬折于歸로다. 歲 甲申流火 六月七日에 大聖七元君은 書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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化翁親視監化事이니라. 嗚呼라, 金火正易하니 否往泰來로다. 嗚呼라, 己位親政하시니 戌位尊空이로다.(조물주께서 친히 다가오는 천지의 변화상태를 보이시니라. 金(四.九) 火(二.七)交易이 이루어지니 고통에 찬 相剋시대는 가고 태평한 相生시대가 오는구나. 己位(太陽之父)가 친히 다스리시니 戊位(太陰之母)는 空에 居處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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亢角二宿尊空詩
何物이 能聽角이랴, 神明도 氐不亢을 室張三十六하니 莫莫莫无量을 武功은 平胃散이요, 文德은 養心湯을 正明金火理하니 律呂調陰陽하니라. (后天運이 다가오는 소리를 누가 들으랴. 神明도 감히 맞서서 이 운세를 거슬리지 못할 것이다. 德化를 온 천하에 펴서 다스리시니 이것이 바로 无量世界라. 武의 위대한 功으로 세계를 평등하게 하시며 文의 큰 德으로 하늘이 부여한 참人間性을 기르시리라. 后天에는 金火가 서로 바뀜으로 天理가 올바르게 밝혀져 調陽律陰의 理致로서 모든 일이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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