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렬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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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우신조 (39.♡.55.15) 작성일15-10-04 17:08 조회6,468회 댓글1건본문
■ 太雲 金亨烈 生涯.
●. 개 설.
1. 본명(족보) 원회(元會), 호(號) 태운(太雲). 2. 본관 안동(安東). 3. 부(父) 김석필(金石必)과 모(母) 이씨(李氏)의 1남 1녀 중 장남(長男). 4. 농업. 5. 임술(壬戌1862)년 5월 5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내광리. 내주평(金堤郡 金山面 內光里 內注坪)에서 출생. 6. 임신(壬申1932)년 11월 28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 자택에서 71세로 작고. 7. 이환구의 처가 김형렬 성도의 막내 동생이며 정춘심 성도와 사돈지간이고 정성백 성도의 장인. 김갑칠, 김준상 형제와는 4촌간이며 김자현 성도와는 사종(四從)간임.
●. 입 도.
1. 임인(壬寅1902)년 4월 13일. 41세.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金堤郡 金山面 淸道里 夏雲洞) 제비창골. 2. 갑신(甲申1884)년에 태인 매당(梅堂) 불출암(佛出庵)에서 당시 14세셨던 천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김형렬은 갑오(甲午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동학군에 편입되어 진군하던 중, 동학군의 행보를 지켜보시며 천지대세를 살피시던 천주님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은혜를 입어 당시의 동학군 청주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그는 천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기만을 고대하다 천주님께서 신축년 7월 5일에 대원사에서 도를 통하셨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듣고 마음속으로 더욱 천주님을 사모하며 만날 날을 갈망하고 있었다. 임인(1902)년 4월 4일 원평 장날에 꿈에 그리던 천주님을 다시 상봉한 김형렬 제자는 그날로부터 9일이 지난 4월 13일 당시 자신이 거주하던 전주 우림면 하운동(全州 雨林面 夏雲洞) 제비창골에 천주님을 모시게 되고 천주님의 천지공사 사업에 일심으로 동참할 것을 천지에 세 번 서약하고 천주님을 따르는 首弟子가 되었다.
●.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천주님을 가장 먼저 추종한 수제자인 김형렬 제자는 9년 천지공사 기간 동안 공사장의 식주인(食主人)이었으며 그의 온 집안 식구가 천주님의 수종을 들었습니다. 천지공사에 가장 일관되게 오랫동안 참관했으며 천주님 어천 후에도 변치 않는 믿음의 화신이었습니다. 또한 이후에 천주님의 천지공사 내용과 말씀을 많이 전하여, 천주님의 말씀과 성적(聖勣)을 글로 편찬하는 데에 불멸의 공덕을 쌓았다. 천주님께서는 김형렬 제자를 지인지감(知人之鑑)김형렬 이라고 하셨다.
●성도의 생애.
임인(壬寅1902)년 4월부터 기유(己酉1909)년 6월에 천주님께서 어천하시기까지 8년 동안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을 다하여 식주인으로서 천주님의 수종을 든 성도이다. 천지공사 기간 동안 자신이 아는 많은 인맥들을 천주님께 천거하여 그들이 천지공사에 쓰일 수 있도록,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천주님 어천 후 고부인이 계신 정읍 대흥리에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중, 당시의 차경석 제자의 불의함에 분개하여 홀로 포교 활동을 시작하여 임술(壬戌1922)년에 미륵불교(彌勒佛敎)라는 독립적인 교단을 조직하였다. 풍운조화(風雲造化)를 임의로 행하는 기적을 보여 그의 미륵불교 교단에 수많은 신도가 모였으나 간부들이 불화하였고 김형렬 성도 자신이 작고한 뒤로는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 정책과 더불어 교단이 해산되었다. 보천교를 탈퇴한 이상호에게 천주님의 천지공사 내용과 성훈을 전하여, 천주님의 말씀과 성적(聖勣)에 대한 초기기록인 대순전경(大巡典經)을 1929년 이상호가 편찬하는데 많은 공덕을 세웠다.
●『대순전경(大巡典經)』이 지닌 한계와 문제점.
대순전경이 지난날 증산 천주님 진리를 밝히는 데 첫 기록 문서로는 도사(道史)적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증산 천주님의 본연의 대도를 창명(彰明)하기에는 천주님을 부르는 공식 호칭 문제를 비롯하여 너무도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정확한 답사를 통한 검증이 없었으며, 당시 이상호, 이정립 형제에게 증언을 해준 분들 역시 극히 제한된 일부에 불과하여 천주님 천지공사의 전체적인 면모가 제대로 드러날 수 없게 되어있다.
●. 天主님과 首弟子.
김형렬 제자는 천주님께서 주인으로 정하시고 9년 천지공사를 시종일관하였다. 그가 천주님을 모시고 첫 개벽공사에 참여한 이후, 9년 동안 늘 천주님과 삶을 함께 했고, 천주님도 그의 집에서 첫 공사를 시작한 이후 마지막 공사까지 그의 가정에 몸 붙여 공사를 집행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終止符 찍는 그 순간까지, 곧 당신의 성체까지도 그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김형렬 제자의 생애를 한없이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새 우주를 여는 대개벽공사장에 주역으로 참여한 그의 큰 공덕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천주님께서 가장 큰 수제자로 쓰신 것은 곧은 품성과 인자다운 덕성 또 천주님이 늘 너는 도선徒善이다. 라고 평하신 것처럼 착한심성을 타고난 인물이다. 김형렬 제자는 천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미리 좌불로 와서 공사에 참여 할 인물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는 좌 불이 되라 하신 것은 선천 부처로 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고 나는 유불이 되리라 하신 것은 후천 천지공사는 살아있는 생부처가 인간으로 강세하심을 강조하심이다. 또한 그에 딸은 천주님과 예식공사를 하였으니 보살계에서 인간으로 탄생하여 천지공사에 참여하여 용담의 중앙에 내원궁으로 강일순 김말순 양위분이 들어않게 되는 것이다. 임인 년에 형렬의 집에 드실 때 산하에 오니 말 한 마리가 자네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셨다고 하시면서 아들을 낳을 것이나 젖이 넷일 것이라 하시고 이름을 천리마라고 지으라 하셨는데 이것은 하도의 용마가 인간계와 천지공사에서 결속을 하려 왔기에 사람이름을 천리마라고 지으라 하신 것이다.
☯ 미륵불교의 창립자 김형렬(金亨烈)의 호는 태운(太雲).
증산교단 주요 교파의 하나인 미륵불교의 창립자 김형렬(金亨烈)의 호는 태운(太雲)이다. 그는 1862년 전라북도 전주군 우림면하운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한문사숙의 훈장을 지냈다. 1894년 정읍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태운도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출전했다. 서울을 향해 진군하는 동학군을 따라 청주전투까지 참가했으나 동행한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1년 7월 증산이 도를 깨달았다는 소문을 듣고 만나보기를 희망하다가, 1902년 4월 증산을 다시 만난 태운은 그 날로 증산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이후 태운은 증산이 1909년 0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 동안 성심껏 시봉했으며 증산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할 때 가장 큰 조력자가 되었다. 1904년 태운은 당시 15세였던 자신의 넷째 딸 말순(末順)으로 하여금 증산의 수종을 들게 했다. 이 때문에 훗날 말순은 미륵불의 좌보처인 홍덕관음불(興德觀音佛)로 믿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약장, 둔궤 등 증산의 유물이 1907년부터 증산을 모셨던 고판례(高判禮)에게 전해졌고, 마침내 1911년 9월 고부인이 증산의 영(靈)과통한 다음 정읍 대흥리에 증산교단 최초의 교단인 태을교를 창립했다. 1913년 봄 태운은 대흥리로 가서 고부인을 뵙고 증산이 저술한 현무경(玄武經)을 등사해 와서 그 이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운은 교권을 장악할 야망을 지녔던 차경석(車京石)과 불화가 생겨 태을교를떠났다. 태운은 1914년 가을 증산의 본부인인 정치순(鄭治順)을 모셔다. 증산의 성령(聖靈)이 감응되게 한다고 주송(呪誦) 수련을 시켰으나 정부인이 수련석에서 실신하여 허사가 되고 말았다. 태운은 자신이 직접 통령(通靈)하겠다고 결심하고, 1915년 봄 모악산 금강대에 올라 백일동안 수도에 전력했다. 마침내 그는 신안(神眼)이 열려 증산의 영을 통해 영서(靈書)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금강대문답(金剛臺問答)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 후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자 자신의 집에서 별도의 교파를 창립하였다. 처음 이 교파는 증산교단의 대표적 주문인 태을주(太乙呪)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동학과 같이 시천주(侍天呪)로 수련시키면서, 입교자의 생년지지(生年地支)에 해당하는 동물을 그린 물형부(物形符)를 그리게 했다. 수련시에는 이 물형부를 날마다 수십 장 씩 그린 뒤에 그 동물과 각자의 이름을 새긴 4각형의 인장(印章)을 찍어서 불사르게 했다. 이에 대해 태운은 선천에는 문자부(文字符)를 사용했지만 후천에는 물형부로 조화권능을 부리는데, 인간의 생년지지가 곧 그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지정된 물형부의 자료이므로 그 지지에 해당하는 동물을 많이그리면 필력을 얻고 몸에 주력(呪力)이 쌓인다고 가르쳤다. 나아가 태운은 이렇게 하면 온갖 병을 물리치고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가르쳤고, 증산을 미륵불(彌勒佛)로 신앙하며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이 바로 증산의 영체(靈體)가 깃들어 있는 불존(佛尊)이라고 주장했다. 1916년 봄에는 독실한 신자 360명을 선발하여 육무(六戊)라는 것을 전국 각지에 묻어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18년 태운은 전주 위봉사(威鳳寺) 주지 곽법경(郭法鏡), 대원사(大院寺) 주지 박금곡(朴錦谷) 등과 협의하여 위봉사 전주포교당을 근거로 교단을 세우고, 금산사에서 미륵불교선양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포교했다. 1919년 9월 태운은 신도 80여명과 함께 금산사 미륵전에서 치성을 드렸다. 이때 금산사 주지 김윤창(金潤昌)이 김형렬과 곽법경이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獨立運動을 일으키려 한다. 는 밀고장을 일본경찰에 보냈다. 이에 경찰이 금산사를 급습 전원 체포하여 전주 일본검사국에 송치했다. 이 사건과 관련 1982년 05월 금산사 만인교 옆에 태운 김형렬 선생 등 88애국지사 충혼비가 건립되었다. 내용은 태운을 비롯하여 군자금 재정책 장기동 360도 종직책 김자현 위봉사 주지 곽법경 등이 전 재산을 매각하여 미륵사상을 포덕 할 것을 결의하고 증산 강일순 선생의 명에 의해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1919년 독립운동 군자금 수금 운동본부를 결성하여 7천여 명을 모았으며, 전국의 미륵 숭봉 자 가운데 총대 88명을 뽑았다고 한다. 당시 19세였던 백성욱(훗날 내무부장관 동국대총장 역임)이 상해임시 정부에 자금 전달자로 선정되었는데 1917년 3만여 원이라는 거금을 1차로 송금했고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밀파되었다고 증언했다. 금산사 치성은 실은 군자금 조달 전국대표자회의였는데 일제가 6개월간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없었다. 당시병사자와 옥 사자가 61명이나 됐으며 겨우 27명만 살아남아 1920년 3월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태운은 이듬해 봄 서울로 올라가 곽법경 장기동 신극 이종옥 신성우 정동훈 정태환 등 흩어졌던 신도들을 규합하여 미륵불교진흥회(彌勒佛敎振興會)를 조직해 종교 활동을 재개했다. 이듬해인 1922년 9월에는 미륵불교(彌勒佛敎)라는 교명으로 바꾸고 본부를 금산사에 두고 포교에 몰두했다. 1923년 봄 태운은 일본정부의 고급관리 朝鮮總督府 관리 각 도 부 군 관리들의 명부를 작성하여 모든 사람의 이름마다 부(符) 한 장씩을 그려 이름을 쓴 뒤 핵심신도 360명을 선발하여 한 사람에게 한 고을씩 맡기고 부를 나눠주면서 각 군 전신주 밑과 신사(神社) 문 앞에 묻게 했다. 이때 돼지고기 한 점과 문어 전복 한 개씩과 호주(胡酒) 한 잔씩을 부(符)에 싸서 같이 묻게 했다. 이러한 일을 행한 뒤 태운은 가을이 오면 일본에 큰 재앙이 일어나리라 예언했다. 그런데 과연 추석 무렵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 태운의 예언이 들어맞았다는 소문이 퍼져 신도들이 모이고 교세가 급증했다. 1923년 6월 태운이 다시 영서(靈書)를 받았다. 가을이 되면 차경석의 보천교가 와해되리라 예언했는데 과연 보천교에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그의 예언이 들어맞자 교세가 다시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또 다른 영서를 잘못 해석하여 군산에서 쌀을 교역해 교단 운영자금으로 사용하려다 실패 교금을 탕진하자 1924년 봄부터 교세가 침체되었다. 그해 9월 태운이 서울에 올라가 있을 때 마침 보천교를 탈퇴하고 증산의 행적을 책으로 편찬하려는 이상호를 만나 자신이보고 들은 증산의 가르침을 전했다. 당시 태운은 임의로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이적을 보여 보천교 탈퇴자 수천명을 미륵불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1926년 10월 태운은 이상호에게 일체의 교무를 맡기고 대원사에 들어가 수련했다. 그러나 교단 사무소를 금산사에 두지 말고 따로 교당을 지어 옮기자는 의견과 이에 반대하는 주요 간부들 사이의 불화로 교단이 위축되었다. 태운은 자신이 받은 영서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내고 유교 경전 가운데 좋은 구절을 뽑아 중화집(中和集)을 간행하고자 했는데 그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1931년 10월 태운이 세상을 떠나자 교단은 와해상태 가되었다. 그 뒤 미륵불교는 김봉진(金奉振)파와 유제봉(柳濟鳳)파로 나뉘었다가 유제봉이 미륵불교를 재건하였다. 1951년 12월에는 최선호(崔善湖)가 태운의 계통을 이어 금산리 자택에 미륵불교라는 간판을 걸고 포교했다. 훗날 이 교단은 최선호의 부인 최선애(崔善愛)에 의해 1970년 대한불교 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이라는 이름으로 문공부에 등록했다. 태운은 日帝强占期에 宗敎組織으로 신도들을 모아 은밀하게 군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獨立運動을 수행한 愛國志士였다. 그는 다소 주술적 방법을 사용했지만 민중들의 염원과 독립의지를 종교적인 방법으로 집약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태운은 증산의 최초의 종도로서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8년 동안 한 결 같이 모신 지극한 성경신(誠敬信)의 소유자였다. 그는 증산이 바로 미륵불이라고 강조하여 새로운 이상세계인 용화세계를 열어 갈 구세주로 굳게 믿었다. 결국 태운은 증산을 불교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증산교 교리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운은 증산의 행적과 가르침을 구술로 후세에 전해 증산교단의 발전에 큰 공적을 이뤘다.
●. 개 설.
1. 본명(족보) 원회(元會), 호(號) 태운(太雲). 2. 본관 안동(安東). 3. 부(父) 김석필(金石必)과 모(母) 이씨(李氏)의 1남 1녀 중 장남(長男). 4. 농업. 5. 임술(壬戌1862)년 5월 5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내광리. 내주평(金堤郡 金山面 內光里 內注坪)에서 출생. 6. 임신(壬申1932)년 11월 28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 자택에서 71세로 작고. 7. 이환구의 처가 김형렬 성도의 막내 동생이며 정춘심 성도와 사돈지간이고 정성백 성도의 장인. 김갑칠, 김준상 형제와는 4촌간이며 김자현 성도와는 사종(四從)간임.
●. 입 도.
1. 임인(壬寅1902)년 4월 13일. 41세.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金堤郡 金山面 淸道里 夏雲洞) 제비창골. 2. 갑신(甲申1884)년에 태인 매당(梅堂) 불출암(佛出庵)에서 당시 14세셨던 천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김형렬은 갑오(甲午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동학군에 편입되어 진군하던 중, 동학군의 행보를 지켜보시며 천지대세를 살피시던 천주님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은혜를 입어 당시의 동학군 청주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그는 천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기만을 고대하다 천주님께서 신축년 7월 5일에 대원사에서 도를 통하셨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듣고 마음속으로 더욱 천주님을 사모하며 만날 날을 갈망하고 있었다. 임인(1902)년 4월 4일 원평 장날에 꿈에 그리던 천주님을 다시 상봉한 김형렬 제자는 그날로부터 9일이 지난 4월 13일 당시 자신이 거주하던 전주 우림면 하운동(全州 雨林面 夏雲洞) 제비창골에 천주님을 모시게 되고 천주님의 천지공사 사업에 일심으로 동참할 것을 천지에 세 번 서약하고 천주님을 따르는 首弟子가 되었다.
●.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천주님을 가장 먼저 추종한 수제자인 김형렬 제자는 9년 천지공사 기간 동안 공사장의 식주인(食主人)이었으며 그의 온 집안 식구가 천주님의 수종을 들었습니다. 천지공사에 가장 일관되게 오랫동안 참관했으며 천주님 어천 후에도 변치 않는 믿음의 화신이었습니다. 또한 이후에 천주님의 천지공사 내용과 말씀을 많이 전하여, 천주님의 말씀과 성적(聖勣)을 글로 편찬하는 데에 불멸의 공덕을 쌓았다. 천주님께서는 김형렬 제자를 지인지감(知人之鑑)김형렬 이라고 하셨다.
●성도의 생애.
임인(壬寅1902)년 4월부터 기유(己酉1909)년 6월에 천주님께서 어천하시기까지 8년 동안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을 다하여 식주인으로서 천주님의 수종을 든 성도이다. 천지공사 기간 동안 자신이 아는 많은 인맥들을 천주님께 천거하여 그들이 천지공사에 쓰일 수 있도록,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천주님 어천 후 고부인이 계신 정읍 대흥리에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중, 당시의 차경석 제자의 불의함에 분개하여 홀로 포교 활동을 시작하여 임술(壬戌1922)년에 미륵불교(彌勒佛敎)라는 독립적인 교단을 조직하였다. 풍운조화(風雲造化)를 임의로 행하는 기적을 보여 그의 미륵불교 교단에 수많은 신도가 모였으나 간부들이 불화하였고 김형렬 성도 자신이 작고한 뒤로는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 정책과 더불어 교단이 해산되었다. 보천교를 탈퇴한 이상호에게 천주님의 천지공사 내용과 성훈을 전하여, 천주님의 말씀과 성적(聖勣)에 대한 초기기록인 대순전경(大巡典經)을 1929년 이상호가 편찬하는데 많은 공덕을 세웠다.
●『대순전경(大巡典經)』이 지닌 한계와 문제점.
대순전경이 지난날 증산 천주님 진리를 밝히는 데 첫 기록 문서로는 도사(道史)적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증산 천주님의 본연의 대도를 창명(彰明)하기에는 천주님을 부르는 공식 호칭 문제를 비롯하여 너무도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정확한 답사를 통한 검증이 없었으며, 당시 이상호, 이정립 형제에게 증언을 해준 분들 역시 극히 제한된 일부에 불과하여 천주님 천지공사의 전체적인 면모가 제대로 드러날 수 없게 되어있다.
●. 天主님과 首弟子.
김형렬 제자는 천주님께서 주인으로 정하시고 9년 천지공사를 시종일관하였다. 그가 천주님을 모시고 첫 개벽공사에 참여한 이후, 9년 동안 늘 천주님과 삶을 함께 했고, 천주님도 그의 집에서 첫 공사를 시작한 이후 마지막 공사까지 그의 가정에 몸 붙여 공사를 집행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終止符 찍는 그 순간까지, 곧 당신의 성체까지도 그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김형렬 제자의 생애를 한없이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새 우주를 여는 대개벽공사장에 주역으로 참여한 그의 큰 공덕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천주님께서 가장 큰 수제자로 쓰신 것은 곧은 품성과 인자다운 덕성 또 천주님이 늘 너는 도선徒善이다. 라고 평하신 것처럼 착한심성을 타고난 인물이다. 김형렬 제자는 천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미리 좌불로 와서 공사에 참여 할 인물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는 좌 불이 되라 하신 것은 선천 부처로 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고 나는 유불이 되리라 하신 것은 후천 천지공사는 살아있는 생부처가 인간으로 강세하심을 강조하심이다. 또한 그에 딸은 천주님과 예식공사를 하였으니 보살계에서 인간으로 탄생하여 천지공사에 참여하여 용담의 중앙에 내원궁으로 강일순 김말순 양위분이 들어않게 되는 것이다. 임인 년에 형렬의 집에 드실 때 산하에 오니 말 한 마리가 자네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셨다고 하시면서 아들을 낳을 것이나 젖이 넷일 것이라 하시고 이름을 천리마라고 지으라 하셨는데 이것은 하도의 용마가 인간계와 천지공사에서 결속을 하려 왔기에 사람이름을 천리마라고 지으라 하신 것이다.
☯ 미륵불교의 창립자 김형렬(金亨烈)의 호는 태운(太雲).
증산교단 주요 교파의 하나인 미륵불교의 창립자 김형렬(金亨烈)의 호는 태운(太雲)이다. 그는 1862년 전라북도 전주군 우림면하운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한문사숙의 훈장을 지냈다. 1894년 정읍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태운도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출전했다. 서울을 향해 진군하는 동학군을 따라 청주전투까지 참가했으나 동행한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1년 7월 증산이 도를 깨달았다는 소문을 듣고 만나보기를 희망하다가, 1902년 4월 증산을 다시 만난 태운은 그 날로 증산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이후 태운은 증산이 1909년 0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 동안 성심껏 시봉했으며 증산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할 때 가장 큰 조력자가 되었다. 1904년 태운은 당시 15세였던 자신의 넷째 딸 말순(末順)으로 하여금 증산의 수종을 들게 했다. 이 때문에 훗날 말순은 미륵불의 좌보처인 홍덕관음불(興德觀音佛)로 믿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약장, 둔궤 등 증산의 유물이 1907년부터 증산을 모셨던 고판례(高判禮)에게 전해졌고, 마침내 1911년 9월 고부인이 증산의 영(靈)과통한 다음 정읍 대흥리에 증산교단 최초의 교단인 태을교를 창립했다. 1913년 봄 태운은 대흥리로 가서 고부인을 뵙고 증산이 저술한 현무경(玄武經)을 등사해 와서 그 이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운은 교권을 장악할 야망을 지녔던 차경석(車京石)과 불화가 생겨 태을교를떠났다. 태운은 1914년 가을 증산의 본부인인 정치순(鄭治順)을 모셔다. 증산의 성령(聖靈)이 감응되게 한다고 주송(呪誦) 수련을 시켰으나 정부인이 수련석에서 실신하여 허사가 되고 말았다. 태운은 자신이 직접 통령(通靈)하겠다고 결심하고, 1915년 봄 모악산 금강대에 올라 백일동안 수도에 전력했다. 마침내 그는 신안(神眼)이 열려 증산의 영을 통해 영서(靈書)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금강대문답(金剛臺問答)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 후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자 자신의 집에서 별도의 교파를 창립하였다. 처음 이 교파는 증산교단의 대표적 주문인 태을주(太乙呪)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동학과 같이 시천주(侍天呪)로 수련시키면서, 입교자의 생년지지(生年地支)에 해당하는 동물을 그린 물형부(物形符)를 그리게 했다. 수련시에는 이 물형부를 날마다 수십 장 씩 그린 뒤에 그 동물과 각자의 이름을 새긴 4각형의 인장(印章)을 찍어서 불사르게 했다. 이에 대해 태운은 선천에는 문자부(文字符)를 사용했지만 후천에는 물형부로 조화권능을 부리는데, 인간의 생년지지가 곧 그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지정된 물형부의 자료이므로 그 지지에 해당하는 동물을 많이그리면 필력을 얻고 몸에 주력(呪力)이 쌓인다고 가르쳤다. 나아가 태운은 이렇게 하면 온갖 병을 물리치고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가르쳤고, 증산을 미륵불(彌勒佛)로 신앙하며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이 바로 증산의 영체(靈體)가 깃들어 있는 불존(佛尊)이라고 주장했다. 1916년 봄에는 독실한 신자 360명을 선발하여 육무(六戊)라는 것을 전국 각지에 묻어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18년 태운은 전주 위봉사(威鳳寺) 주지 곽법경(郭法鏡), 대원사(大院寺) 주지 박금곡(朴錦谷) 등과 협의하여 위봉사 전주포교당을 근거로 교단을 세우고, 금산사에서 미륵불교선양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포교했다. 1919년 9월 태운은 신도 80여명과 함께 금산사 미륵전에서 치성을 드렸다. 이때 금산사 주지 김윤창(金潤昌)이 김형렬과 곽법경이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獨立運動을 일으키려 한다. 는 밀고장을 일본경찰에 보냈다. 이에 경찰이 금산사를 급습 전원 체포하여 전주 일본검사국에 송치했다. 이 사건과 관련 1982년 05월 금산사 만인교 옆에 태운 김형렬 선생 등 88애국지사 충혼비가 건립되었다. 내용은 태운을 비롯하여 군자금 재정책 장기동 360도 종직책 김자현 위봉사 주지 곽법경 등이 전 재산을 매각하여 미륵사상을 포덕 할 것을 결의하고 증산 강일순 선생의 명에 의해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1919년 독립운동 군자금 수금 운동본부를 결성하여 7천여 명을 모았으며, 전국의 미륵 숭봉 자 가운데 총대 88명을 뽑았다고 한다. 당시 19세였던 백성욱(훗날 내무부장관 동국대총장 역임)이 상해임시 정부에 자금 전달자로 선정되었는데 1917년 3만여 원이라는 거금을 1차로 송금했고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밀파되었다고 증언했다. 금산사 치성은 실은 군자금 조달 전국대표자회의였는데 일제가 6개월간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없었다. 당시병사자와 옥 사자가 61명이나 됐으며 겨우 27명만 살아남아 1920년 3월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태운은 이듬해 봄 서울로 올라가 곽법경 장기동 신극 이종옥 신성우 정동훈 정태환 등 흩어졌던 신도들을 규합하여 미륵불교진흥회(彌勒佛敎振興會)를 조직해 종교 활동을 재개했다. 이듬해인 1922년 9월에는 미륵불교(彌勒佛敎)라는 교명으로 바꾸고 본부를 금산사에 두고 포교에 몰두했다. 1923년 봄 태운은 일본정부의 고급관리 朝鮮總督府 관리 각 도 부 군 관리들의 명부를 작성하여 모든 사람의 이름마다 부(符) 한 장씩을 그려 이름을 쓴 뒤 핵심신도 360명을 선발하여 한 사람에게 한 고을씩 맡기고 부를 나눠주면서 각 군 전신주 밑과 신사(神社) 문 앞에 묻게 했다. 이때 돼지고기 한 점과 문어 전복 한 개씩과 호주(胡酒) 한 잔씩을 부(符)에 싸서 같이 묻게 했다. 이러한 일을 행한 뒤 태운은 가을이 오면 일본에 큰 재앙이 일어나리라 예언했다. 그런데 과연 추석 무렵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 태운의 예언이 들어맞았다는 소문이 퍼져 신도들이 모이고 교세가 급증했다. 1923년 6월 태운이 다시 영서(靈書)를 받았다. 가을이 되면 차경석의 보천교가 와해되리라 예언했는데 과연 보천교에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그의 예언이 들어맞자 교세가 다시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또 다른 영서를 잘못 해석하여 군산에서 쌀을 교역해 교단 운영자금으로 사용하려다 실패 교금을 탕진하자 1924년 봄부터 교세가 침체되었다. 그해 9월 태운이 서울에 올라가 있을 때 마침 보천교를 탈퇴하고 증산의 행적을 책으로 편찬하려는 이상호를 만나 자신이보고 들은 증산의 가르침을 전했다. 당시 태운은 임의로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이적을 보여 보천교 탈퇴자 수천명을 미륵불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1926년 10월 태운은 이상호에게 일체의 교무를 맡기고 대원사에 들어가 수련했다. 그러나 교단 사무소를 금산사에 두지 말고 따로 교당을 지어 옮기자는 의견과 이에 반대하는 주요 간부들 사이의 불화로 교단이 위축되었다. 태운은 자신이 받은 영서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내고 유교 경전 가운데 좋은 구절을 뽑아 중화집(中和集)을 간행하고자 했는데 그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1931년 10월 태운이 세상을 떠나자 교단은 와해상태 가되었다. 그 뒤 미륵불교는 김봉진(金奉振)파와 유제봉(柳濟鳳)파로 나뉘었다가 유제봉이 미륵불교를 재건하였다. 1951년 12월에는 최선호(崔善湖)가 태운의 계통을 이어 금산리 자택에 미륵불교라는 간판을 걸고 포교했다. 훗날 이 교단은 최선호의 부인 최선애(崔善愛)에 의해 1970년 대한불교 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이라는 이름으로 문공부에 등록했다. 태운은 日帝强占期에 宗敎組織으로 신도들을 모아 은밀하게 군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獨立運動을 수행한 愛國志士였다. 그는 다소 주술적 방법을 사용했지만 민중들의 염원과 독립의지를 종교적인 방법으로 집약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태운은 증산의 최초의 종도로서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8년 동안 한 결 같이 모신 지극한 성경신(誠敬信)의 소유자였다. 그는 증산이 바로 미륵불이라고 강조하여 새로운 이상세계인 용화세계를 열어 갈 구세주로 굳게 믿었다. 결국 태운은 증산을 불교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증산교 교리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운은 증산의 행적과 가르침을 구술로 후세에 전해 증산교단의 발전에 큰 공적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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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딘님의 댓글
제임스딘 아이피 182.♡.39.104 작성일
아주 좋은 자료네요.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