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글-해원이 필요한 정씨부인(鄭氏婦人)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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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나무 (125.♡.193.57) 작성일13-12-10 15:26 조회7,056회 댓글0건본문
선생께서 열네살 되시던 갑신(1884)년 늦가을에 하동 정씨 문중에서 청혼이 있거늘 즉시 허혼하고 자부(子婦)를 맞이하니 몸이 정상이 아니요. 심덕(心德)이 곱지 못하더라. (道典 1篇18)
신축(1901)년 6월 초에 선생께서 시루봉 밑에서 열나흘간 수도하실 때 정부인께서 는 하루 세끼 밥을 지어 올리는데 세 번 목욕하고 세 번 옷을 갈아 입었다. 시댁이 빈한하여 옷이 단벌이라 홋치마를 입고 겉옷을 빨아 말리다가 비가오면 화로에 쬐어 말리곤 하였다. 하루는 정부인이 밥을 지어 선생께서 수도하시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뇌성이 크게 일고 비가 쏟아져서 寸步도 옮길 수 없어 주저하다가 시간을 어겨서는 안되지 하고 처마 끝에 나서면서 눈을 꽉 감고 발을 내디뎌 종종걸음을 쳤더니 문득 선생께서 수도하시는 움막에 당도하였다. 선생께서 정부인의 고생을 위로하시니라. 정부인이 밥을 올릴 때 비가 오면 그릇이 조금도 비에 젖지 않고 날이 좋은 때와 같았다. 선생께서 즉시 돌아가라 하시므로 수도하시는 움막문을 나서니 또 순식간에 돌아 왔다. 선생께서 수도하실 때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선생께서 도를 이루신 후 정부인은 삭발을 하고 광인처럼 처신하였는데 이러한 정부인을 선생께서 화천하신 뒤에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숭배하여 信徒가 되었다.(龍華典經)
정씨부인(鄭氏婦人)이 간곡(懇曲)히 말씀하여 가로대 이제는 그만 돌아다니시고 집에서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사이다 하니 선생께서 가라사대 그렇게 적은 말이 어디 있느뇨 하시고 이로부터는 집에 가까이 아니 하시니라.(大巡典經3版 1章33)
이 해(1901, 辛丑) 겨울에 본댁(本宅)에서 비로소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行)하실새 창문에 종이를 붙이지 아니하시고 부엌에 불을 때지 아니하시며 홑옷을 입으시고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사 아흐레 동안을 지내시니 새가 벼 말리는 뜰에 내리지 않고 이웃사람은 공포증(恐怖症)이 들어 문 앞으로 지나기를 어려워 하더라.(大巡典經3版 2章2)
이 때에 선생께서 늘 천하창생의 운명을 깊이 걱정하시거늘 정씨부인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불화를 일으키니 선생께서 때로 심히 우울해 하시며 집을 떠나시니라. 하루는 정씨부인이 간곡히 말씀드리기를 “이제는 그만 돌아다니시고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사이다.”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적은 말이 어디 있느냐” 하시고 이 후로는 집을 가까이 아니하시니라.(道典 1篇32)
辛丑年(1901) 여름에 본댁으로 돌아오셔서 先代의 功名帖을 불사르시니라. 정씨부인이 말씀드리기를 “이제는 그만 눌러 앉으셔서 남과 같이 집에서 재미있게 살림에 힘을 쓰사이다” 하시니 “그렇게 소인다운 말이 어디 있느뇨” 하시고 이로부터 본댁에 자주 들리시지 아니하시니라.(眞經 1:48)
구릿골에 계실 새 하루는 황 응종이 와서 뵈옵고 부인에 관한 친명을 전하거늘 선생께서 형렬, 자현, 보경, 공숙등 여러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가정사는 친명대로 처리하노니 너희들이 증인을 설지니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공사에는 수부(首婦)가 있어야 하나니 수부를 천거하라 하시니 형렬이 둘째딸로 하여금 수종들게 하니라.(大巡典經3版 4章13)
갑진(1904)년에 선생께서 구릿골에 계실때 황 응종이 와 뵙고 “정씨부인과 인연을 끓으라.”는 부친의 명을 전하니 이는 이때에 고부 본댁에서 정씨부인이 시부모에게 불효하여 집안이 화평하지 못함으로 부친께서 황 응종을 보내 이 사실을 말씀드리게 함이라...(중략)...그 후에 하루는 정씨 부인이 구릿골에 찾아왔거늘 선생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라. (道典 3篇64)
구릿골에 계실 때 하루는 황응종이 와서 뵙고 鄭婦人에 대한 부친의 命을 고하니 선생께서 형렬, 자현, 보경, 공숙등에게 말씀하시기를 “家庭事는 親命대로 처리하 리니 너희들이 증인이 되니라” 하시니라 (眞經 4:16)
기유년 이월에 자현을 데리고 김제 내주성 (처남) 정남기의 집에 가사 일러 가라사대 이 길이 나의 마지막 길이니 처족(妻族)들을 낱낱이 찾으리라 하시며 등불을 들리시고 밤새도록 여러집을 찾으신 뒤에 이튿날 새벽에 수각리 임상옥의 집에 가사 공사를 보시고 만경 삼거리에 이르사 쉬시며 가라사대 오늘 오후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이리니 내가 잊어버리더라도 네가 잘 살펴보라 하시더니 과연 오후에 백홍(白虹)이 관일(貫日)하니라.(大巡典經3版 9章5)
註解: 龍華典經의 기록은 아주 다르다. 그것은 甑山道가 高婦人만을 신앙하고 대순진리 회나 태극도에서는 首婦를 들이신 일을 증산선생께서 행하신 首夫公事로 보는데 비하여 甑山法宗敎, 龍華典經을 쓴 김낙원의 오동정교단, 미륵종(戊乙敎), 淸道大享院등에서는 首婦 세 분중 高婦人, 鄭婦人 두 분을 모시거나 金婦人까지 세 분을 아울러 모시기 때문인데 어느 분을 모시느냐에 따라 교리의 주장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증산선생께서 정부인을 맞아들여 결혼하신 것에 대해서는 두가지 說이 있는데 양친의 지나친 간선으로 나중에는 중매하는 매파가 나서지 않으므로 초조하고 당황하여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결심하고 간선없이 정해진 혼인이라는 說과 중매를 서려고 매파가 다녀간 뒤에 양친에게 그 매파가 천거한 규수집 이야기를 증산선생께서 듣고 그 집 先代의 家系와 親族의 人品과 惡習을 낱낱이 말씀하심으로서 좀처럼 혼인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는 說이 있다. 그러나 선생의 어린시절 비범하신 여러 일화로 미루어 볼 때 정부인을 맞아들이신 것은 막중한 인륜대사인 혼사에 대해서도 人道에 입각한 정대한 주견을 가졌으리라 생각되며 천지공사로서 정부인과 결혼하셔야 할 천지이치를 깨닫고 그대로 행하신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정부인이 한쪽 발을 저는 불구의 몸과 박색의 형용으로 증산선생과 부부의 의를 맺고 선생의 수도하심을 돕고 선생께서는 정부인을 싫다 않고 맞아들이사 정을 주시고 딸을 두시며 조강지처로 온전한 예모를 갖추어 대하신 것이나 선생께서 成道하신 신축(1901)년 그 해 겨울에 본댁에서 천지공사를 행하신 것이나 화천하시던 해 기유(1909)년 2월에 이 길이 나의 마지막 길이니 처족들을 낱낱이 찾으리라 하시고 등불을 들리시고 밤새도록 여러 집을 찾은 것은 정부인을 수부로서 예우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부인은 빈한한 집에 출가하여 시부모를 애써 시봉하였으나 천품을 잘못 타고나서 시부모의 귀여움을 받아보지 못하였고 선생께서는 수도에 전념하시느라 방랑객처럼 나다니시므로 젊어서 한스러운 세월을 보냈고 늦게 딸을 두어 기르며 선생께서 화천하신 후로도 시종 시부모 공양에 게으르지 않는 등 선생의 수도하시는 뒷바라지에 성의를 다해 공덕을 쌓으신 분이다.
關聯文獻: 眞經1:18, 首婦信仰(dodam.net)
용화전경 중 발췌
제6장 정씨사모(鄭氏師母)
본문내용의 탄신일은 잘못되어서 오기(誤記)를 바로 잡습니다.
정씨대모님(鄭氏大母任)
聖誕-甲戌年 丁卯月 癸酉日 陰01월29일(서기1874년03월17일)
仙化-戊辰年 辛酉月 辛未日 陰08월15일(서기1928년09월28일)
정씨사모님께서는 전라북도 김제군 봉동면 (전하류면) 내고아리 하동 정씨가문에서 서기 1880년 음 정월30일에 탄생하신지라.
세존님께서 정씨사모님이 성장하시던 내광리에서 훈학(訓學)하시게 되였은즉 이로 인(因)한 연유로 중매되여 출가하신지라. 사모(師母)님은 세존님께서 공부하실 때 모든 정성을 다하사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으시고 불피풍우(不避風雨)하사 여일령(如一令)으로 시봉(侍奉)하신지라.
세존님께서 신축년 6월초에 시루 봉하(峯下)에서 14일간을 공부하실 때에 하루에 세번씩 진지를 올리시는데 사모님께서는 당시 22세의 청춘부녀(靑春婦女)로서 하루에 세번씩 목욕하시고 세번씩 옷을 갈아입으시고 시봉(侍奉)하실세 가세(家勢)가 극궁(極窮)하사 의복(衣服)이 단벌이시라 이 단벌 의복을 일일(一日) 세 번식 세탁하시자니 홑치마를 입으시고 다른 옷을 말려 입으시며 비 오시는 날은 화로에 말려 입으시며 시봉하신지라 하루는 진지를 챙겨 공부석(工夫席)으로 출발하실 무렵에 뇌성대우가 나려 촌보(寸步)를 옮겨디딜 수 없는바 주저하시다가 시간을 어기지 않으시려고 처마에 나서면서 눈을 꽉 감고 발을 내디디시며 눈을 뜨시니 문득 공부자라에 당도 되신지라
세존님께서 고생한다고 위로하시고 진지를 올리실 때 그릇이 조금도 비에 젖지 않고 청명한 때와 같은지라 진지를 다 올리시니 즉시로 돌아가라 하심으로 역시 문밖에 나오시니 어느덧 댁에 이르신지라
공부하시는 중 이런 일이 여러 차례 있으신 즉 당시 세존님께서는 천지인 삼위로 진지 세그릇식 올리시되 항상 남방에 설석(設席)하시고 청수상은 항상 고정된 자리에 올려놓으신지라 그후 대원사에서 세존님이 득도하신 후로 사모님께서는 삭발을 하시고 여광여취로 변형(變形)되신지라 그러자 세조님께서 둔(遁)하시니 여러 신도가 이 사모님을 숭배(崇拜)하며 모시게 되매 당시 봉남면 용두리 거주하는 곽상기와 또 함열에 거주하는 백윤명이가 각각 수명식의 신도를 모아 가지고 있는 때라 고로 그들이 모시게 된바 사모님은 이곳에서 수년을 유하시는 중 수시로 외처에 출행하셨으나 그 행방은 일절 밝히지 않으신지라 그 후 사모님께서는 용두리 곽상기 가(家)에 계실세 정읍군 감곡면에 사는 이복경이가 교단을 창설하여 이백여명의 신도를 모아 교단건축을 마치고 낙성식을 크게 준비하고 새 옷을 지여 가지고 와서 사모님을 모셔가려 하니 완강하게 거절하신지라 그러나 그들은 더욱 고집을 세워 교자를 이용하여 모셔다 놓고 치성을 올리시며 심고중 사모님은 급작히 복통으로 나는 죽는다고 소리를 치신지라 이때 문밖에서 불이야 하고 또 소동이 일어나니 치성을 올리든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가면서 사모님을 나가시자고 하는지라 사모께서 나를 불에 태워 죽일려 하는구나 하시며 더욱 소리를 치시니 마치 비가 내려 불은 곧 진화된지라 사모님께서 이튿날 아침에 불탄자리를 나가보시니 석가래 끝에만 돌려 탔거늘 사내녀석들 쓰는 망근 편자처럼 잘돌려 탔구나 하시고 새 옷을 벗어 놓으시고 헌 옷을 도로 입으시고 아침식전에 용두리 원처소로 가시니라 그 후 을축년 십월에 장성백이에 이르사 약십년전에 상면한바 있는 김낙원을 상봉하사 말씀하시기를 명춘(明春)에는 너의 집으로 오겠다 하시고 가시더니 병인년 2얼에 헌보찜을 가지시고 오시여 아주 이사왔노라 하시니라 그 후 김낙원 가(家)에 계실새 외지출입을 금하시고 계신지라
사모님께서는 좌측을 보시려면 눈을 우측으로 돌리시고 우측을 보시려면 좌측을 보셨는지라 그 연고를 여쭈니 천지바래기란 말을 못 들었느냐 하시며 또 보행하실 때는 몸이 약간 왼편으로 기우시고 몸의 상체가 넓으시며 뒷태도가 극히 아름다우신지라 사모님께서 행하신 공사는
1. 병인년 춘절(春節)에 새외올배 45척짜리 일필(一匹)을 가져오라 하사 그 전부로 통치마 한 벌을 지으시고 족기말을 달아 머리 위에서부터 나려 입으시고 청수를 봉한 후 발뒤꿈치만 땅에 대시고 치마폭을 잡으시고 한바퀴 도시니 치마가 마치 우산모양으로 펴지는지라 말씀하시기를 천하여자들이 내 품에 들어와야 사리라 하시니라. 사모님께서는 여자의 여자가 봐야 한다 하시니라.
2. 또 한번은 낭자를 한다 하시고 꼬방머리를 풀어나려 낭자를 만드시면서 불당그래를 가져오라 하사 비녀로 찌르신지라
3. 또 한번은 속옷의 뒤를 꿰매 입으시고 치마는 벗으신 뒤에 이 모양 무엇 같으냐 하시거늘 양복같습니다 하니 앞으로 여자들도 양복을 입으리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공사를 행하신 후에 조끼치마와 통치마가 유행되었으며 꼬방머리(틀어얹은 머리)한 부인은 낭자를 하라고 관에서까지 독려하며 그 후로 낭자하게 되었고 또 부인들이 몸뻬와 양복을 입기 시작한지라
4. 사모님이 항상 공부를 하실세 바가지만한 불덩이를 두 손으로 공덩이처럼 공 놀리듯 하시면서 이불이 부딪히게 되면 천지가 박산 부서지듯 하리라 하시며 네 애비는 수화를 겸용하나 나는 화력만 쓰노라 하시니라.
5. 또 밤에 출행하실새 나의 발자국을 꼭 찾았더라 만일 허방(虛方)치면 죽으리라 경계하시는데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사모님의 발자국만이는 밝은지라
6. 하루는 용화동을 지내시다가 내새끼들이 오물오물 하구나 하시면서 만인의 터라 하시더니 그 후 현재의 국민학교가 설치 된지라.
7. 하루는 금산사를 중심으로 장광팔십리가 평사낙안이라 하신지라
8. 하루는 남조선이라 하시거늘 남조선이 어데니까 하니 그러면 나를 따라 가자 하시기에 따라가니 태인돌챙이 앞뜰에 이르사 보라 하시거늘 보니 전주(電柱)에 남조선이라는 표가 붙어 있는지라
9. 하루는 한탄강을 중심으로 남북이 갈리리라 하시고 우리나라가 세계통일하리라 하시니라.
10. 단발과 고대하는 형용을 하시면서 물귀신같다 하시니라.
11. 또 어둔 밤에 무인지경을 다녀오라 하시기에 근근이 그곳을 당도하면 사모님께서 먼저 와계시더라.
12. 항상 세 뼘의 담뱃대를 입에 무시고 신장로에 나가 계시거늘 남이 꼭 한다고만 유(留)하니 남장부 여장부인데 나에 일에 간섭하지 말라 하시니라.
13. 정묘년 4월 18일에 미륵전에서 부르시거늘 가니 나를 업고 가자 하시기에 나오는 중 등을 입으로 꽉무시고 아프냐고 위로하신지라.
14. 수시로 각 교단에서 치성 후 음식을 갖추어 들이면 절대 거절하시고 아이들도 못먹게 하시며 증산을 팔아먹는다 하시며 분개하시고 신도들이 옷을 지어 들여도 역시 거절하시며 항상 남루하시게 지내시니라.
15. 재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있거든 건져주라 하시니라.
16. 항상 겉보리 죽과 서숙죽을 달게 잡수시며 네가 돈이 있으면 나에게 더 좋은 음식을 해주겠느냐 그러나 너에 안타까운 마음을 알고 있노라 하시며 진수성찬보다 맛있게 하신지라.
17. 또 알아두라 하시면서 장사하는 뼈가 개뼈인지 소뼈인지 뉘가 아느냐 하시니라.
18. 항상 미륵전을 다녀오실 때에는 춤을 덩실덩실 추며 오시니라.
19. 무진 팔월초에 나는 정읍으로 가리라 8월 15일은 인세(人世)를 떠나리니 나의 옷은 다 불사르라 하시며 나의 제사는 네가 지내라 하시기에 따님이 있는데 어찌 저보고 지내라 하시니까 하니 무자식상팔자라고 안하드냐 하시며 나의 제사를 꼭 네가 지내라고 당부하시니라 또 어찌 팔월에 가시나이까 하니 고상한 팔월이라 하시니라.
20. 팔월초오일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신 후 정읍 조철제의 집으로 떠나실 세 치마바위로 가노라 하시면서 떠나시기에 통사동까지 배송을 가니 통정은 다하였으니 더 이상 오지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심으로서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부득이 그곳에서 배송을 마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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