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와참새-용화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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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나무 (125.♡.193.57) 작성일13-12-10 16:41 조회6,934회 댓글0건본문
『용화전경(龍華典經:1972.1.1.)』을 쓰신 분은 무안 해재 출신의 김낙원 선생으로 거기서 안내성 성도를 만나 모악산 백운동에 와 신앙을 한 분으로 딸이 안내성 성도의 둘째 부인이 되어 사돈관계가 되었다 합니다.
한 번쯤은 책을 일독 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한 가지 이 책의 특이한 점은 아무도 안 돌아보고 관심갖지 않는 증산상제님의 부인이신 정씨부인의 일부 행적과 말씀이 기록되어있는 도사(道史)에서도 매우 귀중한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한 책을 구할 수도 없을 뿐더러 쉽게 들어볼 수 없는 정씨부인의 말씀을 별도의 장(章)으로 분류까지 해서 책을 내신 김낙원 선생의 혜안에 감탄을 하며 성도님들과 공유하기 위해 별도로 제6장만 분류해서 내용을 실어보겠습니다.
또한 원래 7장까지 따로 되어 있었는데 가끔 검색을 해서 찾다보면 불편해서 합본을 한 뒤에 자동숫자가 이어지는 바람에 원래 책에 나와있는 일련 장번호와는 좀 틀린 것 같습니다.
이 책 역시 어느 분이 한글에서 잘 편집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같은 내용으로 더 깔끔하게 편집돼 있으시면 새로 저처럼 올려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6장 본문내용의 탄신일은 잘못되어서 오기(誤記)를 바로 잡습니다.
정씨대모님(鄭氏大母任)
聖誕-甲戌年 丁卯月 癸酉日 陰01월29일(서기1874년03월17일)
仙化-戊辰年 辛酉月 辛未日 陰08월15일(서기1928년09월28일)
제6장 정씨사모(鄭氏師母)
정씨사모님께서는 전라북도 김제군 봉동면 (전하류면) 내고아리 하동 정씨가문에서 서기 1880년 음 정월30일에 탄생하신지라.
세존님께서 정씨사모님이 성장하시던 내광리에서 훈학(訓學)하시게 되였은즉 이로 인(因)한 연유로 중매되여 출가하신지라.
사모(師母)님은 세존님께서 공부하실 때 모든 정성을 다하사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으시고 불피풍우(不避風雨)하사 여일령(如一令)으로 시봉(侍奉)하신지라.
세존님께서 신축년 6월초에 시루 봉하(峯下)에서 14일간을 공부하실 때에 하루에 세번씩 진지를 올리시는데 사모님께서는 당시 22세의 청춘부녀(靑春婦女)로서 하루에 세번씩 목욕하시고 세번씩 옷을 갈아입으시고 시봉(侍奉)하실세 가세(家勢)가 극궁(極窮)하사 의복(衣服)이 단벌이시라 이 단벌 의복을 일일(一日) 세 번식 세탁하시자니 홑치마를 입으시고 다른 옷을 말려 입으시며 비 오시는 날은 화로에 말려 입으시며 시봉하신지라 하루는 진지를 챙겨 공부석(工夫席)으로 출발하실 무렵에 뇌성대우가 나려 촌보(寸步)를 옮겨디딜 수 없는바 주저하시다가 시간을 어기지 않으시려고 처마에 나서면서 눈을 꽉 감고 발을 내디디시며 눈을 뜨시니 문득 공부자라에 당도 되신지라
세존님께서 고생한다고 위로하시고 진지를 올리실 때 그릇이 조금도 비에 젖지 않고 청명한 때와 같은지라 진지를 다 올리시니 즉시로 돌아가라 하심으로 역시 문밖에 나오시니 어느덧 댁에 이르신지라
공부하시는 중 이런 일이 여러 차례 있으신 즉 당시 세존님께서는 천지인 삼위로 진지 세그릇식 올리시되 항상 남방에 설석(設席)하시고 청수상은 항상 고정된 자리에 올려놓으신지라
그후 대원사에서 세존님이 득도하신 후로 사모님께서는 삭발을 하시고 여광여취로 변형(變形)되신지라 그러자 세조님께서 둔(遁)하시니 여러 신도가 이 사모님을 숭배(崇拜)하며 모시게 되매 당시 봉남면 용두리 거주하는 곽상기와 또 함열에 거주하는 백윤명이가 각각 수명식의 신도를 모아 가지고 있는 때라 고로 그들이 모시게 된바 사모님은 이곳에서 수년을 유하시는 중 수시로 외처에 출행하셨으나 그 행방은 일절 밝히지 않으신지라
그 후 사모님께서는 용두리 곽상기 가(家)에 계실세 정읍군 감곡면에 사는 이복경이가 교단을 창설하여 이백여명의 신도를 모아 교단건축을 마치고 낙성식을 크게 준비하고 새 옷을 지여 가지고 와서 사모님을 모셔가려 하니 완강하게 거절하신지라
그러나 그들은 더욱 고집을 세워 교자를 이용하여 모셔다 놓고 치성을 올리시며 심고중 사모님은 급작히 복통으로 나는 죽는다고 소리를 치신지라 이때 문밖에서 불이야 하고 또 소동이 일어나니 치성을 올리든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가면서 사모님을 나가시자고 하는지라
사모께서 나를 불에 태워 죽일려 하는구나 하시며 더욱 소리를 치시니 마치 비가 내려 불은 곧 진화된지라 사모님께서 이튿날 아침에 불탄자리를 나가보시니 석가래 끝에만 돌려 탔거늘 사내녀석들 쓰는 망근 편자처럼 잘돌려 탔구나 하시고 새 옷을 벗어 놓으시고 헌 옷을 도로 입으시고 아침식전에 용두리 원처소로 가시니라
그 후 을축년 십월에 장성백이에 이르사 약십년전에 상면한바 있는 김낙원을 상봉하사 말씀하시기를 명춘(明春)에는 너의 집으로 오겠다 하시고 가시더니 병인년 2얼에 헌보찜을 가지시고 오시여 아주 이사왔노라 하시니라 그 후 김낙원 가(家)에 계실새 외지출입을 금하시고 계신지라
사모님께서는 좌측을 보시려면 눈을 우측으로 돌리시고 우측을 보시려면 좌측을 보셨는지라 그 연고를 여쭈니 천지바래기란 말을 못 들었느냐 하시며 또 보행하실 때는 몸이 약간 왼편으로 기우시고 몸의 상체가 넓으시며 뒷태도가 극히 아름다우신지라
사모님께서 행하신 공사는 병인년 춘절(春節)에 새외올배 45척짜리 일필(一匹)을 가져오라 하사 그 전부로 통치마 한 벌을 지으시고 족기말을 달아 머리 위에서부터 나려 입으시고 청수를 봉한 후 발뒤꿈치만 땅에 대시고 치마폭을 잡으시고 한바퀴 도시니 치마가 마치 우산모양으로 펴지는지라 말씀하시기를 천하여자들이 내 품에 들어와야 살리라 하시니라. 사모님께서는 여자의 여자가 봐야 한다 하시니라.
또 한번은 낭자를 한다 하시고 꼬방머리를 풀어나려 낭자를 만드시면서 불당그래를 가져오라 하사 비녀로 찌르신지라
또 한번은 속옷의 뒤를 꿰매 입으시고 치마는 벗으신 뒤에 이 모양 무엇 같으냐 하시거늘 양복같습니다 하니 앞으로 여자들도 양복을 입으리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공사를 행하신 후에 조끼치마와 통치마가 유행되었으며 꼬방머리(틀어얹은 머리)한 부인은 낭자를 하라고 관에서까지 독려하며 그 후로 낭자하게 되었고 또 부인들이 몸뻬와 양복을 입기 시작한지라
사모님이 항상 공부를 하실세 바가지만한 불덩이를 두 손으로 공덩이처럼 공 놀리듯 하시면서 이불이 부딪히게 되면 천지가 박산 부서지듯 하리라 하시며 네 애비는 수화를 겸용하나 나는 화력만 쓰노라 하시니라.
또 밤에 출행하실새 나의 발자국을 꼭 찾았더라 만일 허방(虛方)치면 죽으리라 경계하시는데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사모님의 발자국만이는 밝은지라
하루는 용화동을 지내시다가 내새끼들이 오물오물 하구나 하시면서 만인의 터라 하시더니 그 후 현재의 국민학교가 설치 된지라.
하루는 금산사를 중심으로 장광팔십리가 평사낙안이라 하신지라
하루는 남조선이라 하시거늘 남조선이 어데니까 하니 그러면 나를 따라 가자 하시기에 따라가니 태인돌챙이 앞뜰에 이르사 보라 하시거늘 보니 전주(電柱)에 남조선이라는 표가 붙어 있는지라
하루는 한탄강을 중심으로 남북이 갈리리라 하시고 우리나라가 세계통일하리라 하시니라.
단발과 고대하는 형용을 하시면서 물귀신같다 하시니라.
또 어둔 밤에 무인지경을 다녀오라 하시기에 근근이 그곳을 당도하면 사모님께서 먼저 와계시더라.
항상 세 뼘의 담뱃대를 입에 무시고 신장로에 나가 계시거늘 남이 꼭 한다고만 유(留)하니 남장부 여장부인데 나에 일에 간섭하지 말라 하시니라.
정묘년 4월 18일에 미륵전에서 부르시거늘 가니 나를 업고 가자 하시기에 나오는 중 등을 입으로 꽉무시고 아프냐고 위로하신지라.
수시로 각 교단에서 치성 후 음식을 갖추어 들이면 절대 거절하시고 아이들도 못먹게 하시며 증산을 팔아먹는다 하시며 분개하시고 신도들이 옷을 지어 들여도 역시 거절하시며 항상 남루하시게 지내시니라.
재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있거든 건져주라 하시니라.
항상 겉보리 죽과 서숙죽을 달게 잡수시며 네가 돈이 있으면 나에게 더 좋은 음식을 해주겠느냐 그러나 너에 안타까운 마음을 알고 있노라 하시며 진수성찬보다 맛있게 하신지라.
또 알아두라 하시면서 장사하는 뼈가 개뼈인지 소뼈인지 뉘가 아느냐 하시니라.
항상 미륵전을 다녀오실 때에는 춤을 덩실덩실 추며 오시니라.
무진 팔월초에 나는 정읍으로 가리라 8월 15일은 인세(人世)를 떠나리니 나의 옷은 다 불사르라 하시며 나의 제사는 네가 지내라 하시기에 따님이 있는데 어찌 저보고 지내라 하시니까 하니 무자식상팔자라고 안하드냐 하시며 나의 제사를 꼭 네가 지내라고 당부하시니라 또 어찌 팔월에 가시나이까 하니 고상한 팔월이라 하시니라.
팔월초오일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신 후 정읍 조철제의 집으로 떠나실 세 치마바위로 가노라 하시면서 떠나시기에 통사동까지 배송을 가니 통정은 다하였으니 더 이상 오지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심으로서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부득이 그곳에서 배송을 마치니라.
한 번쯤은 책을 일독 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한 가지 이 책의 특이한 점은 아무도 안 돌아보고 관심갖지 않는 증산상제님의 부인이신 정씨부인의 일부 행적과 말씀이 기록되어있는 도사(道史)에서도 매우 귀중한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한 책을 구할 수도 없을 뿐더러 쉽게 들어볼 수 없는 정씨부인의 말씀을 별도의 장(章)으로 분류까지 해서 책을 내신 김낙원 선생의 혜안에 감탄을 하며 성도님들과 공유하기 위해 별도로 제6장만 분류해서 내용을 실어보겠습니다.
또한 원래 7장까지 따로 되어 있었는데 가끔 검색을 해서 찾다보면 불편해서 합본을 한 뒤에 자동숫자가 이어지는 바람에 원래 책에 나와있는 일련 장번호와는 좀 틀린 것 같습니다.
이 책 역시 어느 분이 한글에서 잘 편집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같은 내용으로 더 깔끔하게 편집돼 있으시면 새로 저처럼 올려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6장 본문내용의 탄신일은 잘못되어서 오기(誤記)를 바로 잡습니다.
정씨대모님(鄭氏大母任)
聖誕-甲戌年 丁卯月 癸酉日 陰01월29일(서기1874년03월17일)
仙化-戊辰年 辛酉月 辛未日 陰08월15일(서기1928년09월28일)
제6장 정씨사모(鄭氏師母)
정씨사모님께서는 전라북도 김제군 봉동면 (전하류면) 내고아리 하동 정씨가문에서 서기 1880년 음 정월30일에 탄생하신지라.
세존님께서 정씨사모님이 성장하시던 내광리에서 훈학(訓學)하시게 되였은즉 이로 인(因)한 연유로 중매되여 출가하신지라.
사모(師母)님은 세존님께서 공부하실 때 모든 정성을 다하사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으시고 불피풍우(不避風雨)하사 여일령(如一令)으로 시봉(侍奉)하신지라.
세존님께서 신축년 6월초에 시루 봉하(峯下)에서 14일간을 공부하실 때에 하루에 세번씩 진지를 올리시는데 사모님께서는 당시 22세의 청춘부녀(靑春婦女)로서 하루에 세번씩 목욕하시고 세번씩 옷을 갈아입으시고 시봉(侍奉)하실세 가세(家勢)가 극궁(極窮)하사 의복(衣服)이 단벌이시라 이 단벌 의복을 일일(一日) 세 번식 세탁하시자니 홑치마를 입으시고 다른 옷을 말려 입으시며 비 오시는 날은 화로에 말려 입으시며 시봉하신지라 하루는 진지를 챙겨 공부석(工夫席)으로 출발하실 무렵에 뇌성대우가 나려 촌보(寸步)를 옮겨디딜 수 없는바 주저하시다가 시간을 어기지 않으시려고 처마에 나서면서 눈을 꽉 감고 발을 내디디시며 눈을 뜨시니 문득 공부자라에 당도 되신지라
세존님께서 고생한다고 위로하시고 진지를 올리실 때 그릇이 조금도 비에 젖지 않고 청명한 때와 같은지라 진지를 다 올리시니 즉시로 돌아가라 하심으로 역시 문밖에 나오시니 어느덧 댁에 이르신지라
공부하시는 중 이런 일이 여러 차례 있으신 즉 당시 세존님께서는 천지인 삼위로 진지 세그릇식 올리시되 항상 남방에 설석(設席)하시고 청수상은 항상 고정된 자리에 올려놓으신지라
그후 대원사에서 세존님이 득도하신 후로 사모님께서는 삭발을 하시고 여광여취로 변형(變形)되신지라 그러자 세조님께서 둔(遁)하시니 여러 신도가 이 사모님을 숭배(崇拜)하며 모시게 되매 당시 봉남면 용두리 거주하는 곽상기와 또 함열에 거주하는 백윤명이가 각각 수명식의 신도를 모아 가지고 있는 때라 고로 그들이 모시게 된바 사모님은 이곳에서 수년을 유하시는 중 수시로 외처에 출행하셨으나 그 행방은 일절 밝히지 않으신지라
그 후 사모님께서는 용두리 곽상기 가(家)에 계실세 정읍군 감곡면에 사는 이복경이가 교단을 창설하여 이백여명의 신도를 모아 교단건축을 마치고 낙성식을 크게 준비하고 새 옷을 지여 가지고 와서 사모님을 모셔가려 하니 완강하게 거절하신지라
그러나 그들은 더욱 고집을 세워 교자를 이용하여 모셔다 놓고 치성을 올리시며 심고중 사모님은 급작히 복통으로 나는 죽는다고 소리를 치신지라 이때 문밖에서 불이야 하고 또 소동이 일어나니 치성을 올리든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가면서 사모님을 나가시자고 하는지라
사모께서 나를 불에 태워 죽일려 하는구나 하시며 더욱 소리를 치시니 마치 비가 내려 불은 곧 진화된지라 사모님께서 이튿날 아침에 불탄자리를 나가보시니 석가래 끝에만 돌려 탔거늘 사내녀석들 쓰는 망근 편자처럼 잘돌려 탔구나 하시고 새 옷을 벗어 놓으시고 헌 옷을 도로 입으시고 아침식전에 용두리 원처소로 가시니라
그 후 을축년 십월에 장성백이에 이르사 약십년전에 상면한바 있는 김낙원을 상봉하사 말씀하시기를 명춘(明春)에는 너의 집으로 오겠다 하시고 가시더니 병인년 2얼에 헌보찜을 가지시고 오시여 아주 이사왔노라 하시니라 그 후 김낙원 가(家)에 계실새 외지출입을 금하시고 계신지라
사모님께서는 좌측을 보시려면 눈을 우측으로 돌리시고 우측을 보시려면 좌측을 보셨는지라 그 연고를 여쭈니 천지바래기란 말을 못 들었느냐 하시며 또 보행하실 때는 몸이 약간 왼편으로 기우시고 몸의 상체가 넓으시며 뒷태도가 극히 아름다우신지라
사모님께서 행하신 공사는 병인년 춘절(春節)에 새외올배 45척짜리 일필(一匹)을 가져오라 하사 그 전부로 통치마 한 벌을 지으시고 족기말을 달아 머리 위에서부터 나려 입으시고 청수를 봉한 후 발뒤꿈치만 땅에 대시고 치마폭을 잡으시고 한바퀴 도시니 치마가 마치 우산모양으로 펴지는지라 말씀하시기를 천하여자들이 내 품에 들어와야 살리라 하시니라. 사모님께서는 여자의 여자가 봐야 한다 하시니라.
또 한번은 낭자를 한다 하시고 꼬방머리를 풀어나려 낭자를 만드시면서 불당그래를 가져오라 하사 비녀로 찌르신지라
또 한번은 속옷의 뒤를 꿰매 입으시고 치마는 벗으신 뒤에 이 모양 무엇 같으냐 하시거늘 양복같습니다 하니 앞으로 여자들도 양복을 입으리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공사를 행하신 후에 조끼치마와 통치마가 유행되었으며 꼬방머리(틀어얹은 머리)한 부인은 낭자를 하라고 관에서까지 독려하며 그 후로 낭자하게 되었고 또 부인들이 몸뻬와 양복을 입기 시작한지라
사모님이 항상 공부를 하실세 바가지만한 불덩이를 두 손으로 공덩이처럼 공 놀리듯 하시면서 이불이 부딪히게 되면 천지가 박산 부서지듯 하리라 하시며 네 애비는 수화를 겸용하나 나는 화력만 쓰노라 하시니라.
또 밤에 출행하실새 나의 발자국을 꼭 찾았더라 만일 허방(虛方)치면 죽으리라 경계하시는데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사모님의 발자국만이는 밝은지라
하루는 용화동을 지내시다가 내새끼들이 오물오물 하구나 하시면서 만인의 터라 하시더니 그 후 현재의 국민학교가 설치 된지라.
하루는 금산사를 중심으로 장광팔십리가 평사낙안이라 하신지라
하루는 남조선이라 하시거늘 남조선이 어데니까 하니 그러면 나를 따라 가자 하시기에 따라가니 태인돌챙이 앞뜰에 이르사 보라 하시거늘 보니 전주(電柱)에 남조선이라는 표가 붙어 있는지라
하루는 한탄강을 중심으로 남북이 갈리리라 하시고 우리나라가 세계통일하리라 하시니라.
단발과 고대하는 형용을 하시면서 물귀신같다 하시니라.
또 어둔 밤에 무인지경을 다녀오라 하시기에 근근이 그곳을 당도하면 사모님께서 먼저 와계시더라.
항상 세 뼘의 담뱃대를 입에 무시고 신장로에 나가 계시거늘 남이 꼭 한다고만 유(留)하니 남장부 여장부인데 나에 일에 간섭하지 말라 하시니라.
정묘년 4월 18일에 미륵전에서 부르시거늘 가니 나를 업고 가자 하시기에 나오는 중 등을 입으로 꽉무시고 아프냐고 위로하신지라.
수시로 각 교단에서 치성 후 음식을 갖추어 들이면 절대 거절하시고 아이들도 못먹게 하시며 증산을 팔아먹는다 하시며 분개하시고 신도들이 옷을 지어 들여도 역시 거절하시며 항상 남루하시게 지내시니라.
재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있거든 건져주라 하시니라.
항상 겉보리 죽과 서숙죽을 달게 잡수시며 네가 돈이 있으면 나에게 더 좋은 음식을 해주겠느냐 그러나 너에 안타까운 마음을 알고 있노라 하시며 진수성찬보다 맛있게 하신지라.
또 알아두라 하시면서 장사하는 뼈가 개뼈인지 소뼈인지 뉘가 아느냐 하시니라.
항상 미륵전을 다녀오실 때에는 춤을 덩실덩실 추며 오시니라.
무진 팔월초에 나는 정읍으로 가리라 8월 15일은 인세(人世)를 떠나리니 나의 옷은 다 불사르라 하시며 나의 제사는 네가 지내라 하시기에 따님이 있는데 어찌 저보고 지내라 하시니까 하니 무자식상팔자라고 안하드냐 하시며 나의 제사를 꼭 네가 지내라고 당부하시니라 또 어찌 팔월에 가시나이까 하니 고상한 팔월이라 하시니라.
팔월초오일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신 후 정읍 조철제의 집으로 떠나실 세 치마바위로 가노라 하시면서 떠나시기에 통사동까지 배송을 가니 통정은 다하였으니 더 이상 오지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심으로서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부득이 그곳에서 배송을 마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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