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전-홍교수님과 세번의 만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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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나무 작성일13-12-12 17:29 조회6,760회 댓글0건본문
홍교수님과의 만남 이야기
홍교수님과 저와는 나이 차이가 26~27년 나니까 당연히 자식뻘이 됩니다. 홍교수님은 제게는 부집의 존장이 되시는 분입니다.
홍교수님 약력을 보니 15살 되시던 1949년 가을에 부모님을 따라 증산교에 입교하여 봉청수하고 기도, 송주하는 증산교 신행을 시작하셨다고 나옵니다. 저는 22살 되던 1982년 봄에 당시 대학교 3학년 학생으로 대전 증산*장을 찾아가서 상제님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모 교단에 입교할 당시 교수님은 48살의 장년이셨고, 아마도 상제님 사업에 한참 열정을 불태우시며 원숙한 경지에 올라가실 때라고 생각됩니다.
[첫 번째 만남]
홍교수님과의 첫 번째 만남은 90년대 초였다고 기억됩니다. 정확한 연도는 확실히는 모릅니다. 다만 수도권에 살면서 예산 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찾아뵈었던 것으로 봐서, 90년 혹은 91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서울 강남도장에서 상근을 한바 있었고, 경제적인 문제로 상근 생활을 접고, 청년부 교령을 하면서, 학원선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왜 증*도 신도인 내가 증산교를 하시는 홍교수님을 직접 찾아뵈었는가? 그것은 홍교수님이 1988년에 내신 범증산교사를 구입한 저로서는 언젠가 꼭 한번 만나 뵈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범증산교사라는 책에서 받은 일종의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800페이지의 대작으로서 상제님 교운사의 최초교단인 고수부님 교단사(선도교사)로부터 시작하여, 차경석의 보천교, 김형렬의 미륵불교, 안내성 교단, 박공우 교단, 문공신 교단 등 100년 교운사를 정리한 범증산교사 책에는 당시 제가 몸담던 과거 교단의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상제님 성언 말씀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 뿐이겠습니까? 범증산교사 라는 책은 너무도 놀라운 책이었습니다. 모든 교단사에서 나왔던 역사적인 모든 경전류, 자료 등을 총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상제님 진리 계열에서 이런 엄청난 분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범증산교사 책을 구입한 이후부터 늘 가까이 두면서 탐독하였습니다. 특히 각 교단사의 말미에 나오는 상제님 성언 말씀은 너무도 신기했고 소중했습니다.그 책을 읽노라면 진리 경계가 확 틔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야!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구나. 가까운 시일에 한번 찾아뵙고, 말씀도 나누고, 필요한 책이 있으면 구입도 해야겠다, 또 보고 싶은 책이 있다면 보여 달라고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늘 생각만 하면서 차일피일 미뤄졌습니다. 그러다가 학원 선생을 해서 약간의 돈이 생기자 당장 실행했습니다. 예산에 있는 범증산교연구원(홍교수님 자택)으로 전화를 해서, 통화를 한 후에 내려간 것입니다. 당시 저는 홍교수님 자택에서 대순전경 초판본(1929년)을 구입하였습니다. 그책은 일제시대 우리말 문투로 상제님 성언과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생생한 현장감이 왔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가슴 벅착습니다. 저는 내려간 김에 이것저것 많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증*도 신도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서울 구로구에 있었던 홍교수님의 증산회관 테러사건이 있었는데, 그 문제로 신경이 날카롭던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떻게 시간 가는지를 몰랐고,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홍교수님은 중국 음식을 시켜 주어 짜장면을 함께 먹고서, 또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어졌습니다. 그날 홍교수님 방에서 함께 잠을 자고 다음날 일찍 올라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만남이후 저는 홍교수님과 전화 통화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자주했던 것은 아니지만 가끔 안부전화를 드렸고, 홍교수님이 발간하는 월간 천지공사를 정기구독하였습니다. 처음 뵌 홍교수님에 대한 인상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분이라는 느낌과 함께 상제님 진리에 대한 강한 열정을 지니셨다는 것이었습니다.
1996년에 도장 책임자 생활을 잠시 접고, 다시 한 번 홍교수님을 찾아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제 무의식의 마음 한구석은 늘 홍교수님을 향하고 있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지금도 두 번째 만남에서 제게 주신 증산교개설(홍교수님 1982년 출간) 이라는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잦은 이사로 인해 다른 많은 책을 버렸지만, 홍교수님의 범증산교사와 증산교개설이라는 책만은 꼭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진설명) 범증산교사 는 수부님의 교단 창립으로 시작하여 증산*사로 매듭짓고 있다. 위대한 대작이 아닐수 없다. 100년 교운사를 누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가? 내용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것이다. 고수부님, 김형렬 성도, 안내성 성도, 이상호 이정립 선생 사진을 게시하고 있고, 100년 교운사에 명멸했던 교단들의 역사와 신앙을 관통하고 있다. 상제님 진리를 신앙하고 공부하는 도생들에게 큰 나침반이 된 책이 아닐수 없다. 후일 모 교단에서 답사를 했던 분은 범증산교사를 등대 삼고, 나침반 삼아 답사를 했었다고 말했다. 상제님 100년 신앙사에 한 획을 그은 대작이라고 생각이 든다.
(사진설명) 홍교수님과 두번째 만남에서 직접 받은 증산교개설(1982년 발간) 책과 1988년에 발간하신 범증산교사, 범증산교사 라는 책이 홍교수님과 나와의 만남을 갖게 해준 책이다. 증산교개설은 총4부로 되어 있는데, 상제님의 생애, 증산교의 교의, 증산교의 사회사상, 증산교단의 교사로 구성된다. 특히 마지막을 증산교단의 초교파운동사 와 공통교의 로 매듭짓고 있다. 이로 볼 때 홍교수님은 '나 아니면 다 이단'이라는 상극의 편협성을 뛰어넘어, 모든 증산교단을 인정하고 진정 상생의 통합과 수렴을 구상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증산참신앙이 나아가야할 귀감이 아닐수 없다고 본다
[마지막 만남]
저는 1998년 3월 수도권 생활을 접고, 대전 본부로 발령을 받아 이사를 하여 내려 갔습니다. 1998년 무인(戊寅)년은 서기 2000년으로 다가서는 세기말과 새천년 밀레니움의 시작이라는 분위기, 무기 천지한문, 인묘진 사부지 사오미 개명이라는 시간대가 겹치는 그런 때였습니다.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회장은 소 500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었습니다. 99년 들어 제가 몸담던 교단은 소위 핵랑군 제도를 들고 나오면서 그 유명한 사오미 개명의 개벽몰이 분위기에 발동을 걸고 있었습니다. 저는 연구부에 배치되어, 월간지 작업에 참여하면서, 한편 기본교리 책자 와 대순진리회의 비극이라는 책자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도문 분위기는 서서히 개벽에의 기대감으로 달아 올랐습니다. 그런데 포교부가 아닌 연구부 소속으로 글쓰고 교리강의하는 역할이었기에, 당시 지방 도장의 밑바닥 신앙분위기와 조직문화는 잘 몰랐습니다. 막상 본부간부로 있었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지방도장에서 일어나는, 왜곡되어가던 신앙 문화에 대해서는 다소 어두웠습니다.
당시 신도들의 화두는 임박한 개벽설이었습니다. 무기천지한문과 사오미 개명! 그리고 또 하나는 홍교수님에 대한 적개심 유포 분위기 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어떤 젊은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천지의 정의로운 신명이 있다면 왜 홍 아무개를 잡아가지 않느냐?”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당시 저도 그 교단 신도였기에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였습니다.
저는 교육과 강의를 하는 위치였기에, 교단 교주님이 주장하는 내용을 비교적 소상하게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방직후 김제 용화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소위 2변 교운 증산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모 교단 교주님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① 해방직후 이상호 이정립 형제를 교주로 모시고 신앙한 게 아니고, 동지적 입장에서 일했다.
② 당시 증산교라는 이름도 내가 붙였으며, 모든 포교를 내가 총사수, 총지휘자로 다 했다. 특히 충청도 지역은 0.1%도 다른 기운이 들어가지 않았고 내가 다 했다.
③ 해방직후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집을 사주었고, 경제적인 뒷받침을 내가 다 해주었다. 이정립씨를 장가보내준 사람도 나였다.
④ 이상호씨로부터 의통을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먼저 만난 박공우 교단의 후계자였던 송종수씨로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다. 이상호씨는 개벽의 때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해방되면서 의통을 공개한 것이지, 내게 전수한 게 아니다.
⑤ 홍성렬이 형 홍성찬을 내 연맥에서 포교했으며, 홍성렬은 거기서 붙어서 나온 내 직계신도다. 그런 홍성렬이가 지금 와서 과거의 내막도 모르면서 범증산교사 책에서 나에게 도전하는 것은 뿌리를 잡아먹으려는 것으로서 배사율이며 배은망덕한 짓이다.
2001년 봄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소속 교단의 분위기는 홍성렬 교수님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전신도에게 유포되고 있었지만 저는 예산의 홍교수님 댁을 자발적으로 찾아갔습니다. 교단에서 시켜서 한 것도 아니요, 또 특별한 의도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뭔가 뚫리지 않는 진리에 대한 갈급증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홍교수님의 순교(2001년 10월 25일)를 앞두고, 천지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가서 뵈어라 하고 기회를 준 것이 아니었나 생각도 해 봅니다.
이미 안면이 있고, 전화통화도 가끔 했던 사이였던지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함께 마당을 거닐면서 나눈 대화중에 태을주의 기적을 강조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자택에 있었던 예산교당 성전도 보여주시고 당신님 서재도 보여주셨습니다. 저와의 만남과 대화가 흡족하셨던지 이곳에서 수덕사가 멀지 않으니 함께 갔다 오자고 하셨습니다. 저도 흔쾌히 응하였습니다. 저는 홍교수님과 사모님을 제 차로 모시고 수덕사를 찾았습니다. 물론 길안내는 홍교수님이 하셨습니다.
(사진설명) 2001년 봄, 홍교수님 부부를 내 차로 모시고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 갔었다. 비록 소속 교단은 달랐지만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장애가 될수 없었다. 내가 홍교수님에게 끌렸던 근원적인 원인은 그분이 상제님 진리를 많이 연구해서 잘 알고 있는 대선배라는 것이었고, 그분을 통해 무언가 상제님 진리의 갈급증을 해소하고자 함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홍교수님은 부드럽고 자상하고 겸손한 분이라는 느낌이었다. 물론 짧은 몇번의 만남을 통해 사람을 다 파악하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펴낸 책을 읽어 보면서, 그분의 삶과 열정, 특히 상제님 진리에서 가장 중요한 '참'이라는 것에 비추어 볼 때, 거짓없는 삶, 진실된 삶을 추구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셋은 마치 소풍 나온 학생처럼 들떴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저로서는 난생 처음 가보는 수덕사였습니다. 본 법당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사모님의 미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미 노년으로 가시는 지긋한 나이셨지만, 순박한 처녀 같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셨으니까요. 홍교수님과 상제님 진리에 관련한 내용에서 신변에 관한 것들로 확대되면서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제 가족관계도 물으셨고, 교수님의 일상적인 얘기도 몇 도막 들려주셨습니다.
저도 교수님도 사모님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수덕사 관람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녁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사모님이 저녁식사를 차려주셨고, 홍교수님과 함께 상을 마주하며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미 저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평소 범증산교사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들을 여쭈었고, 홍교수님은 자상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밤 9시가 넘어가면서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을 여쭈었습니다. 그것은 상제님의 종통과 법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전의 모 단체는 아버지와 아들, 부자지간이 하고 있으며, 그렇게 혙통으로 계통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맘속에는 의구심이 듭니다. 대전 교단이 많은 책을 쓰고 진리를 대중화 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부자세습은 아니지 않는가 생각이 듭니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로 부자세습을 하게 하셨을까요?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상제님의 종통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혈통으로 종통이나 계통을 세습한다는 증산 대성의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김낙원 선생이 지으신 용화전경에 ”인륜보다 천륜이 크노라 하시고 천륜으로 우주일가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이 부자세습 혹은 혈통 세습을 의미하는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중성 선생의 천지개벽경을 보면 부자세습을 강하게 부정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노선생이 증산대성의 말씀을 기록한 여러 경전들을 비교해 가면서 면밀하게 살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저는 증산천사공사기 및 대순전경 초판 재판 삼판 오판 육판 을 비롯하여, 이러저러한 경전들을 수집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비교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하지만 몸담고 있던 교단의 개벽분위기가 더 가슴에 와 닿을 때였습니다. 그날 밤 교수님께 한평생 연구하신 결과로서 상제님이 종통 혹은 법통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소상하게 말씀해 달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은 1968년에 돌아가신 남주 이정립 선생과 자신과의 사이에 있었던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남주 이정립 선생님께서 내가 어렸을 적부터 무척이나 귀여워 해주셨습니다. 특히 돌아가시는 선화 즈음에 이르러서 두 번이나 나를 부르셨어요. 1968년 무신년에 74세로 선화하셨는데 당시 나는 34세로 예산농전 교수로 있을 때입니다. 선화하기 얼마 전 남주 종사께서는 나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성렬이~ 자네에게 뒷일을 맡기네. 자네가 대학교수 사회부터 이 도를 뿌리내리도록 하게나~”
그날밤 이런 대화를 나누며 교수님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마루와 부엌 그리고 방안의 구조도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함께 이부자리를 깔고 누었는데, 잠이 곧바로 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상념들이 오갔습니다. 당시 도문의 분위기는 홍교수님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홍교수님 집에 와서, 평소에 마음 한구석 찜찜하게 생각했던 부자세습에 대한 의혹을 묻고 있었던 것이었니까요. 그날 밤 홍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대번에 부자세습이 상제님의 천지공사가 아니다는 걸 깨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깨치기 까지는 아직도 제게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저는 증*도 신도였으며 제가 그 단체를 위해 해야 할 몫과 숙성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날 대전으로 돌아온 뒤에도 간헐적으로 홍교수님과 전화통화를 하였습니다. 물론 홍교수님과의 만남은 동료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과 과정이 지났는데, 그해 10월 25일, 홍교수님 내외분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접하고 누가 한 짓인지 금방 짐작이 갔습니다. 10월 26일 아침에 저는 홍교수님 피살사건의 최종지시자로 알려진 고(故) 이근직 행정실장과 함께 지방으로 출장을 가는 일이 있었고, 그분의 언행과 분위기를 통하여 이를 확인했던 것입니다. 이근직 교수님과는 홍교수님 관련하여 또 다른 만남과 인연이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범증산교사가 후대 경전에 끼친 영향]
홍교수님 부부가 피살당하기 55일전 2001년 신사년, 9-11테러 라는 세운의 큰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도문의 분위기는 임박한 개벽에의 기대가 한껏 물이 오르려는 때였습니다. 12년마다 되풀이됐던 사오미 개명의 헛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교수님 부부 피살사건은 당시 집단적인 개벽바람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41살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참 어릴 때입니다. 그저 순진하기만 해서 단순한 충성심에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제가 상제님 진리의 참과 진실에 눈을 뜨기 까지는 그로부터 다시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2010년 3월 26일,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교수형으로 돌아가신지 꼭 100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서해바다에서 한국군함 천안함(天安艦)이 폭침되어 두 쪽으로 갈라지며 많은 군인들이 희생당하는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로부터 열흘쯤 뒤에 홍교수님 피살사건의 범인으로 모교단 신도 3명이 사건발생 9년 만에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2010년은 제가 더 이상 가짜 개, 임술(壬戌) 가구(假狗)의 자식이 아니라, 진짜 개, 신미(辛未) 진구(眞狗)의 자식으로 거듭나는 전기점이 된 해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본부 간부로 있는 동안 여러 사람들과 교분을 쌓았는데, 특히 경전 작업에 핵심 역할을 했던 어떤 분과 아주 긴밀한 인간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분은 답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안정남선생, 안일완선생, 김천수 옹 등을 만나신 분이고, 그 증언을 들었으며, 그 증언 말씀을 성구로 만드는 작업을 했던 분입니다. 그분은 어느 날 제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범증산교사가 없었다면 저는 답사에서 큰 성과를 못 내었을 것입니다. 저의 답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범증산교사입니다. 그 책은 제 답사에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각 교단의 내력과 인명, 지명, 풍부한 자료 등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범증산교사가 없었다면 우리 경전은 아마도 상당부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분의 이런 말씀이 아니더라도 범증산교사가 모 교단의 경전에 미친 영향은 누가 봐도 지대합니다. 범증산교사 각 교단사 본문 내용과 특히 말미에는 어느 경전에도 나오지 않는 상제님의 성언 말씀이 실려 있습니다. 이것은 홍범초 교수님이 피와 땀과 청춘을 바쳐서 직접 발로 뛰어 채록한 것입니다.
저와 인간적인 교분을 맺은 그분은 아직도 그 단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말을 아껴야 합니다. 더한 말도 많이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며, 지금 이 정도라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어디 저의 집뿐이겠습니까? 대한민국이 공업화되기 전에는 거개 다 농사꾼의 자식입니다. 가을철에 추수를 하여 타작을 한 후에 신작로에 탈곡한 벼를 널어서 말리는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꼭 남이 농사지은 것을 새벽이나 밤에 와서 몰래 훔쳐가는 도둑놈이 있었습니다. 벼가 아니더라도 밭작물이나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소를 훔쳐가는 소도둑놈들도 있었습니다.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보면 도둑놈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붓대가진 놈이 가장 큰 도둑놈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번 사는 인생, 잠깐 왔다 가는 인생, 정직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남이 피 땀 흘려 농사지은 것을 내 것처럼 은근슬쩍 써버리는 그런 날도둑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상제님의 진리는 천지신명이 내려다보는 신도(神道)입니다. 천상에 가면 만인경(萬人鏡)이라는게 있다고 합니다. 그 거울 앞에 서면 모든 게 다 드러납니다.
복록신 13-09-23 10:48 댓글상단
일에는 그때와 그시점이 되어야 과거의 모든관계성을 늦게나마 깨우치게되고
그상황에 맡는사람과 소통을 이룬사람과 뜻을모아 큰의식을 갖은사람을 다양하게이끌어내 커다란 생산적문화콘덴츠를 만들어 낼수 있읍니다
그런면에서 홍교수님과의 만남은 큰의미를 부여하는데 부족함이 없으리라봅니다
즐거운 추석연휴를 잘보내셨는지요
재밌고 활기찬 한주가 되었으면합니다
답댓글
아라사군사님의 댓글
아라사군사 13-09-23 11:51 댓글상단
"네 입술에 곤륜산을 달라 무진 동지에 기두하여 묻는 자가 있으리니 의통인패 한 벌을 전하라 좋고 나머지가 너희들의 차지가 되리라."
상제님께서는 박공우 성도를 통해 이상호 선생에게 의통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입술에 곤륜산을 달라는 극비사항으로 말씀하신 거죠.
모교주는 자신이 박공우 제자 송종수로부터 전해받았다고 주장하지만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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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암(박공우)의 태을교 신도들은 인안의 명을 받들어 태을주판과 인을 방 아랫벽을 헐고 그 속에 넣고 발라두었는데 인암 선화 후에 그의 계승자인 송종수가 벽을 헐고 보니 삭아서 없어졌더라는 것이다. 증산교의 전신인 대법사에서 신묘(1951)년 봄에 인패를 만들 때에 송종수가 이상호에게 태을주판과 인을 빌려 달라 하니 이를 거절하였다. (고봉주의 구술). 이 뒤에 박인암의 태을교에서도 호신부와 호부를 만들었는데 대법사에서 만든 것과 양각과 음각이 바뀌어 있었다.(박기백의 구술) (범증산교사 p.22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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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온전하게 의통이 전해진 곳은 현 증산교(대법사)인 것입니다. 송종수로부터 전해받았다면 잘못된 의통을 전해받은 것이죠.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모교단의 의통이 이상호 선생이 원소유자인 의통이라면 정상적인 의통이지만 이를 정식 승계와 허락없이 획득한 것이고 송종수로부터 받은 의통이라면 삭아서 사라진 의통이거나 원형과 모양이 다른 의통이죠.
박인암 성도로부터 이상호 선생이 의통을 전수받을 때 이상호 선생은 치성을 올리고 받았습니다. 즉 양자간의 정식 인수인계 절차를 거쳤던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상호승인과 예식의 절차없이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교단 모교주는 이상호선생으로부터 이와 같은 인수절차를 밟고 의통을 전수받은 바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모교단 모교주는 송종수로부터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송종수는 원형과 다른 의통, 즉 삭아서 없어진 의통을 원형 그대로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이상호 교단의 의통은 박공우 성도와 제작하여 나눠가질 때의 원형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통을 모교주가 전수받았다면 천지에서 인정할까요? 무효인 것입니다. 이런 모든 과정과 결과는 천지의 조화라고 생각합니다. 모교주가 다시 의통형태를 원형대로 되돌렸거나 모방을 해도 정식인수절차가 없었으므로 천지에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짝퉁은 짝퉁일 뿐이지 정품이 될 수 없습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되는 거 아닙니다.
답댓글
re: 예지자 ↓
예지자님의 댓글
예지자 13-09-23 12:37 댓글상단
to 아라사군사 ↑ 1.아라사님의 의통부분에 대한 좋은 지적을 해 주셨네요!!의통부분에 대한 진리정립도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새로운 화두 부분 제시 좋았네요
2.홍성렬 교수님에 대한 선구자적 추존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이상호-이정립이후 두 맥으로 갈라져..대전 특정단체와 홍범초로 갈려진 부분이 다시 통합되는 양상으로 전개됩니다.교운공사에서 새로운 분기점입니다.참신앙에서 가장 잘 한 일은 1)영정복원 2)예법과 태을주 원형 복원 3)진리정립을 위한 범증산교사를 바탕으로 하는 맥잡기 차원의 홍성렬 교수님 추대와 해원입니다.대세는 증산참신앙이네요...이제는 각 분야별 진리정립이며 진법의 참신앙의 기틀을 다같이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이제는 용봉기를 높이 들어야 할 시기입니다.댓글다는 체질이 아니지만 워낙 잘 하는 모습들이 나오니 자꾸 달고 싶어집니다.신비전님 이하 참신앙 운영진 여러분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답댓글
re: 덕산 ↓
복록신님의 댓글
복록신 13-09-23 15:06 댓글상단
생산적문화콘덴츠를 만들어 낼수있다는 대목이 마음에 걸려 댓글을 더올립니다
자칫하면 홍교수님의 업적과 정신을 바르게 드러내려는 참신앙의 참뜻을 비취
려는데 방향성에 흠이되고 누가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들게 되었읍니다
참신앙에 혜안과 큰안목으로 글을 올리시는분은 자신의 오랜신앙 나름전문성을
갖고 몰입의 경지와 번민과고뇌의 오랜시간을 거쳐 터득된 역량이 진리는같지만 각자의 다른 전문성을 갖고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며진리의 성숙과 안목을 키워
주면서 각자가 소리없이 참신앙을 이끌가는 훌륭한 역할을 하고계시는 아주
소중 하신분들 입니다
성도님들이 온신경을 쓰며 교운공사의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듯 저또한 세운공사에 현실적으로 어떡해 적용해 경제적 대안으로 생산성을 바르게 적용시켜야 되는지 오랜기간 고뇌와 번뇌의 시간이었읍니다
전그래서 생산성 경제적 문화콘덴츠를 교운과 유기적으로 호환을 이룰까 이것이
제화두입니다
그러다보니 생산성 문화콘덴츠 통해사람의 미묘한관계성인 사회의 다변화의틀
가정 경제를 유기적으로 펼쳐 어찌상제님의진리를 어떡해 사회에서 인정받고 더 나아가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단체로 거듭나 성사재인을 이룰것인가 이것이끈질긴 저의 신념의 시간대 입니다
홍교수님의 만남의 의미 부여가 생산성 문화콘덴츠라는 단어로 퇴색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글을 적었읍니다
세부적인건 세운공사 경제 그리고인성이된 외부의인재를 협력을 이끌어 내는 노하우관련된 글은 본문에 올리게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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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님의 댓글
덕산 13-09-23 18:44 댓글상단
to 예지자 ↑ 예지자님의 말씀
"참신앙에서 가장 잘 한 일은 1)영정복원 2)예법과 태을주 원형 복원 3)진리정립을 위한 범증산교사를 바탕으로 하는 맥잡기 차원의 홍성렬 교수님 추대와 해원입니다.대세는 증산참신앙이네요"
백프로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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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님의 댓글
덕산 13-09-23 18:47 댓글상단
신비전님과 홍범초선생님이 이런 인연이 있었군요.
참신앙에서 꼭 홍교수님이 밝혀주신 진리의 원맥을 잘 드러내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홍교수님이 쓴 저서들을 꼭 읽어봐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참신앙에서 과거 경전들을 보급해 주시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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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님의 댓글
양심 13-09-25 11:18 댓글상단
털끝하나라도 거짓이 있을수 없는 것이 진리의 모습입니다..
참신앙의 힘찬 행보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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