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성의 풍류와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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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3-12-11 23:37 조회9,05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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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성의 풍류와 일탈
안내성 성도가 처음 증산상제님을 찾아 올 때, 증산상제님께서는 안내성 성도의 인물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셨습니다.
@ 대선생이 용암에 계시더니, 정읍사람 차경석과 안내성 그리고 그 밖에 한 사람이 찾아뵙고 제자되기를 원하니라. 대선생께서 한숨 쉬며 크게 한탄하시거늘 "험악한 팔자로다. 한꺼번에 일시에 역적의 무리들이 찾아오는구나. 나는 천지신명에게 질정하여 판단하리니, 뭇 신명들이 거부하여 물리치면 나도 어찌할 수 없노라."하시고 신명에게 칙령을 내리시니, 얼마 후에 밀씀하시기를 "뭇 신명들이 내 말을 듣노라. 경석은 시대의 운수를 따라 잠깐 사용하려 하거늘, 오직 회제(이언적)가 백성들의 일을 걱정하여 이의를 제기하노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p324-325)
증산상제님께서는 안내성 성도가 역모의 기운와 더불어, 화려한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여색을 탐하고 풍류를 즐기는 사치의 기운과, 남을 무시하고 다투는 투쟁의 기운을 많이 갖고 있음을 걱정하셨습니다. 후천은 금수대도술의 상극시대가 아니고 지심대도술의 상생시대이기에, 마음을 잘 닦아 금수의 성정을 버리지 못하면 상생세상을 열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선천은 억음존양의 상극시대였지만 후천은 정음정양의 상생세상이기에, 색을 탐하는 것을 풀어없애지 않으면 정음정양의 상생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없습니다.
먼저, 안내성 성도가 갖고 있는 역모의 기운을 풀어없애기 위해, 안내성 성도를 독방에 가두면서까지 마음 공부와 태을주 공부를 많이 시키셨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태을주와 운장주를 읽어주시며 태을주와 운장주를 많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을 잘 닦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면 옥문이 스스로 열린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 기유(1909)년 음력 6월 22일 대성께서 경만의 집을 떠나시며 현무경과 흰병을 주시면서 "이 자리를 3년간 떠나지 말고 앉아서 태을주를 읽으라' 하셨으므로, 주문을 읽는데 몰두하여 대성께서 화천하신 줄도 몰랐다. 경만이 살고 있는 집은 셋집이어서, 집주인은 밤낮없이 주송만 하는 가난한 셋방사람들이 미워서 그가 앉아있는 방바닥을 파놓는 등 냉대하였으나 개의않고 주송을 끊이지 않았다. 앉은 자리를 뜨지 않고 주송을 하니, 입은 옷이 다 닳고 헤져서 혼술만 남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3년을 채웠다. 이때 안주인이 금가락지와 은비녀를 잃어버려 그것을 찾느라고 소동이 벌어졌는데, 경만의 영안에 금가락지와 은니녀가 주인 며느리의 농구석에 있는 것이 보여 찾아주어 찬사를 받았다. (범증산교사 p199)
두번째, 안내성 성도가 여색을 탐하는 것을 시험해 보셨고, 팔선녀와 더불어 사치하며 풍류를 즐기는 것을 경계하시며, 그 기운을 풀어먹도록 하셨습니다.
@ 새벽이 됨에 각기 정좌케 하시고, 종이 한 조각씩 나누어 주시며 가라사대 "후천 음양도수를 보려하노니 각기 남이 알지 않게 마음에 있는 대로 점 하나에 아내 하나씩 표하여 점쳐 들이라." 하시거늘, 각기 마음대로 점쳐 올리니, 응종은 두점이요 경수는 석점이요 내성은 여덟점이요 경석은 열두점이요 공신은 한점이라.(다른 사람은 미상함)
상제님 가라사대 "아홉점은 없으니 일남구녀란 말을 알 수 없도다. 팔선녀라는 말이 있으므로 여덟점을 쳤느냐." 또 응종과 경수에게 물어 가라사대 "노인들이 두 아내를 원하니 어떻게 감당하려 하느뇨." 대하여 가로대 "후천이 되면 새 기운이 돌지 아니하리이까." 가라사대 "그럴 듯 하도다." 경석에게 물어 가라사대 "왠 아내를 열둘이나 원하느냐." 대하여 가로대 "십이 제국에 하나씩 두어야 만족하겠나이다." 가라사대 "그럴 듯도 하도다." 또 공신에게 물어 가라사대 "경석은 열둘이나 원하는 데 너는 어찌 하나를 원하느뇨." 대하여 가로대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요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일양(一陰一陽)이 원리인줄 아나이다."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또 가라사대 "공사를 잘 보았으니 특히 성비하여 손님대접을 잘 하라." 하시거늘, 공신이 명하신 대로 하니라. (대순전경 pp218-219)
@ 하루는 상제님께서 대흥리에 계시더니 내성이 배알하니, 지난 번에 명으로 독방에 홀로 여러날 앉아거하며 음식을 절식하였더니, 말소리가 모기소리와 같고 기운이 없어 간신히 걸음을 옮기더라. 내성이 증산상제님께 슬피울며 애원하며 고하기를 "제자가 사경에 이르렀사오니 목숨을 구해 주소서." 하니, 증산상제님께서 내성을 쳐다보시고 슬퍼 눈물을 흘리시며 "네가 심히 굶주렸느냐." 대하여 고하기를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증산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성아, 네 소원대로 내 몸에 녹을 넉넉히 내려 줄 것이니, 이후에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옷을 입거라. 조상제사를 정성껏 지내고 농사일에 전념 하거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고, 남의 자녀를 유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고 진실되게 행동하라. 서자와 상민을 무시하고 천대하지 말고, 백정과 무당을 공경하여 대하라. 만약 네가 죄를 짓지 않고 내 명을 기다린다면, 내 세상에서 너는 영화를 누리리라."
제자가 상제님께 여쭙기를 "지금 내성으로 하여금 상제님의 명으로 여러 날 굶으며 독방에 기거하게 하시니, 내성이 이 다음에 증산상제님의 도에 큰 폐해를 남기게 되나이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성의 소원이 옷과 밥과 색에 있나니, 그 소원을 들어주어 녹을 내려주노라. 만약 내성이 마음을 고쳐 어질게 되면 대도지하에 천만다행이리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p460-461)
세번째, 안내성 성도의 살기(殺氣)를 이용해 이등박문을 제거하는 천지공사를 보시고, 싸움을 경계하시며 남과 다투고 싸우지 말라고 엄명하셨습니다.
@ 무신(1908)년 겨울에 대선생이 대흥리에 계시더니, 내성에게 명하시어 "너는 내 몸을 단단히 결박하라." 내성이 무섭고 두려운 생각으로 땀을 비오듯 흘리며 "정녕 죽을 죄를 받을지라도 어찌 감히 지존의 몸을 결박할 수 있으리있까." "내가 명을 내리거늘 어찌 명을 어기려 하느냐." 내성이 대선생의 엄명에 감히 명을 어길수 없어, 몸을 떨며 대선생께 다가가 겨우 묶는 흉내만 내거늘, 크게 야단을 치시며 "너는 나와 너불어 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단단히 결박하라." 내성이 울음을 터뜨리며 명을 받들어 몸을 단단히 결박하니라. 대선생께서 명하시기를 "내성아, 큰 곤봉으로 내 몸을 마구 치거라." 내성이 눈물을 흘리며 고하기를 "원컨대 제가 대신 맞겠사오니, 이러한 잘못을 범하게 제자에게 명하지 마소서." "내성아 너는 여러 말 하지 말고 명령대로만 행하거라." 내성이 엄명을 따라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고 몸을 떨면서 겨우 때리는 흉내만 내거늘, 크게 책망하사 "내가 다 이유가 있어서 너에게 명하는 것이거늘, 어찌 명을 따르지 않고 이렇게 때리는 흉내만 내느냐, 어서 맹타하라." 내성이 엄명에 어쩔 수 없어 부득히 하여 눈물을 흘리며 맹타하니라. 대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장차 천하의 난국을 바로잡으려면 일등박문을 가히 사용할 것이오, 이등박문을 사용함은 불가하노라." 제자가 여쭙기를 "이제 이등박문을 폐하는데 내성을 사용하심은 무슨 이유입니까." "내가 안씨 성을 썼느니라. 이등박문이 일을 하는 것이 지지부진하니, 천운이 시급하고 백성의 형편에 일이 늦음을 한하노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516)
@ 안내성이 일본 사람과 싸워서 몸에 상해를 입고 와 뵈인 데 가라사대 "이로부터 너는 내 문하에서 물러가라. 너의 죽고 사는 일을 내가 간여치 않겠노라." 내성이 이유를 몰라서 엎드려 대죄하니 가라사대 "시속에 길성소조(吉星所照)를 말하나 길성이 따로 있는 곳이 없고 일본 사람을 잘 대접하는 곳에 길성이 비치나니, 네가 이제 일본 사람과 싸우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함이라. 내가 어찌 너를 가까이 하리오." 하시니라. (대순전경 p144)
@ 안내성에게 일러 가라사대 "불의로써 남의 자제를 유인치 말며, 남의 보배를 탐내지 말며, 남과 서로 싸우지 말며, 도한과 무당에게 천하게 대하지 말라." (대순전경 p321)
증산상제님의 우려대로, 증산상제님 사후에 안내성 성도가 사치하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안내성 성도는 처음에는 고수부님을 모시고 대흥리에서 포교했지만, 교금을 낭비하며 사치한다는 말을 차경석 성도에게 듣고, 교단을 이탈하여 별도의 교단을 차리게 됩니다.
@ 안내성은 고부인이 교단을 창설한 뒤에 전라남도 순천 여수 등지에 가서 포교에 종사하더니, 갑인(1913)년 봄에 내성이 사치한 옷을 입고 말을 타고 신도 두어사람을 대리고 본소에 왔거늘, 경석이 교금을 낭비한다고 꾸짖으니, 내성이 불평을 품고 돌아가서 교단을 이탈하고 여수읍 가국리에서 따로 교단을 창설하였다. (증산교사 p69)
안내성은 그 후 을묘(1915)년에 교본부를 순천군 도산면 게표리로 옮기고, 병진(1916)년에 무안군 해제면 삼봉리로, 무오(1918)년에 전북 김제군 수류면 금성리로, 정묘(1927)년에 전주군 우림면 청도리 백운동으로 옮겼습니다. 백운동에는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켜 교인촌을 이루었습니다. 기사(1929)년에는 보천교를 나온 문정삼과 채규일을 비롯한 많은 보천교인들이 모여들어 교세가 크게 떨치자, 교명을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라고 하였고, 이 때 교인수는 3천여명이었습니다. 포교방법은 '내성이 상제님의 수제자이므로 상제께서 새시대운명을 조종하는 권한을 내성에게 주셨다.'고 역설하며, '일심으로 수도하면 멀지 아니하여 상제께서 환생하여 큰 복록을 마련하여 주신다'고 선전하였습니다.
안내성의 꿈은 팔선녀를 데리고 선경세상의 호화사치를 마음껏 누려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이같은 안내성의 꿈이 잘못됐음에도 불구하고, 안내성의 꿈이 워낙 간절하였기에, 여러 경계의 말씀을 하시며 그 꿈을 해원시켜 주지 않으면 않되었습니다. 안내성은 증산상제님을 만나 자신의 꿈을 소원성취해 나갔지만, 증산상제님께서 내려주신 경계의 말씀을 잊었기에, 시간이 갈수록 점차 정음정양의 진리와는 일탈되어 나갔습니다. 증산교사를 편찬한 이정립과 용화전경을 펴낸 김낙원은, 안내성의 '풍류와 일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 내성은 신도의 처녀 십여명을 뽑아들여서 첩으로 정하고, 또 상제님의 부인(정부인)과 사망한 아우 중선의 부인과 동서남북 사방선관의 부인을 정하여 놓고 예대(禮待)하여 풍류로써 신도들을 가르치며, 청소년의 학교교육을 금지하며, 또 신도들에게 죽음은 흉한 일이니 시체를 보면 신기(神氣)를 손상한다 하여 신도들의 상사(喪事)에 조위(弔慰)를 금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세간에 악평이 크게 일어나고 간부들이 이반하게 되어, 신미(1931)년부터 교세가 쇠퇴되기 시작하였다. (증산교사 p181)
@ 갑술(1934)년 경에 경만이 백운기(白雲起)를 불러들였는데, 백운기는 하느님이신 증산대성님과 직접 문답을 나누고 조화를 보인다고 하다가, 문답내용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신도들이 더욱 동요하게 되었다. 백운기는 증산대성은 천황(天皇)이요, 안경만은 지황(地皇)이요, 자기는 인황(人皇)을 자처했는데, 조화를 보인다고 치성실에서 거시랭이를 이용하여 붉은 무지개를 만들다가 들켜서 도주한 뒤로 경만의 신망은 더욱 멀어졌다. (범증산교사 p201 김낙원 구술)
안내성 교단의 일탈에 관한 김낙원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 김낙원은 영광 사람으로, 무오년(1918)년에 순천 양률에서 안내성을 만나서 함께 포교하다가, 갑자(1924)년에 원평의 장승백이로 올라와서 2년 동안 200여명을 포교하여 경만 문하에 다니게 하였으나, 백운기가 잡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를 따르는 신도들을 이끌고 병자(1936)년 신농사(神農社)를 조직한 채경대를 좇아 만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선도(仙道)의 교세는 더욱 약화되기 시작했다. (범증산교사 p201 김낙원 구술)
유달리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강했던 안내성은, 아버지를 찾아 중국까지 떠돌다가 우여곡절 끝에 귀국하여 증산상제님을 만났지만, 증산상제님의 간곡한 가르침을 벗어났기에, 결국 일탈된 신앙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꿈대로, 아름다운 옷과 좋은 음식에 팔선녀를 데리고 풍류의 길을 걸었던 안내성 성도는, 기축(1949)년 음력 10월에 아쉬운 생을 마감합니다. 안내성 성도가 사망하자, 신도들은 노장파의 유영주, 곽상곤(거제 사람), 백운기(충청도 사람), 소장파의 안문환(경만의 아들)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안내성 성도의 예에서 볼수 있듯이, 천지부모님이신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을 모시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정음정양의 신로를 걷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YongBongCom
[출처]안내성의 풍류와 일탈 (용봉서신(龍鳳書信))|작성자디딤돌
안내성 성도가 처음 증산상제님을 찾아 올 때, 증산상제님께서는 안내성 성도의 인물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셨습니다.
@ 대선생이 용암에 계시더니, 정읍사람 차경석과 안내성 그리고 그 밖에 한 사람이 찾아뵙고 제자되기를 원하니라. 대선생께서 한숨 쉬며 크게 한탄하시거늘 "험악한 팔자로다. 한꺼번에 일시에 역적의 무리들이 찾아오는구나. 나는 천지신명에게 질정하여 판단하리니, 뭇 신명들이 거부하여 물리치면 나도 어찌할 수 없노라."하시고 신명에게 칙령을 내리시니, 얼마 후에 밀씀하시기를 "뭇 신명들이 내 말을 듣노라. 경석은 시대의 운수를 따라 잠깐 사용하려 하거늘, 오직 회제(이언적)가 백성들의 일을 걱정하여 이의를 제기하노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p324-325)
증산상제님께서는 안내성 성도가 역모의 기운와 더불어, 화려한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여색을 탐하고 풍류를 즐기는 사치의 기운과, 남을 무시하고 다투는 투쟁의 기운을 많이 갖고 있음을 걱정하셨습니다. 후천은 금수대도술의 상극시대가 아니고 지심대도술의 상생시대이기에, 마음을 잘 닦아 금수의 성정을 버리지 못하면 상생세상을 열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선천은 억음존양의 상극시대였지만 후천은 정음정양의 상생세상이기에, 색을 탐하는 것을 풀어없애지 않으면 정음정양의 상생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없습니다.
먼저, 안내성 성도가 갖고 있는 역모의 기운을 풀어없애기 위해, 안내성 성도를 독방에 가두면서까지 마음 공부와 태을주 공부를 많이 시키셨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태을주와 운장주를 읽어주시며 태을주와 운장주를 많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을 잘 닦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면 옥문이 스스로 열린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 기유(1909)년 음력 6월 22일 대성께서 경만의 집을 떠나시며 현무경과 흰병을 주시면서 "이 자리를 3년간 떠나지 말고 앉아서 태을주를 읽으라' 하셨으므로, 주문을 읽는데 몰두하여 대성께서 화천하신 줄도 몰랐다. 경만이 살고 있는 집은 셋집이어서, 집주인은 밤낮없이 주송만 하는 가난한 셋방사람들이 미워서 그가 앉아있는 방바닥을 파놓는 등 냉대하였으나 개의않고 주송을 끊이지 않았다. 앉은 자리를 뜨지 않고 주송을 하니, 입은 옷이 다 닳고 헤져서 혼술만 남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3년을 채웠다. 이때 안주인이 금가락지와 은비녀를 잃어버려 그것을 찾느라고 소동이 벌어졌는데, 경만의 영안에 금가락지와 은니녀가 주인 며느리의 농구석에 있는 것이 보여 찾아주어 찬사를 받았다. (범증산교사 p199)
두번째, 안내성 성도가 여색을 탐하는 것을 시험해 보셨고, 팔선녀와 더불어 사치하며 풍류를 즐기는 것을 경계하시며, 그 기운을 풀어먹도록 하셨습니다.
@ 새벽이 됨에 각기 정좌케 하시고, 종이 한 조각씩 나누어 주시며 가라사대 "후천 음양도수를 보려하노니 각기 남이 알지 않게 마음에 있는 대로 점 하나에 아내 하나씩 표하여 점쳐 들이라." 하시거늘, 각기 마음대로 점쳐 올리니, 응종은 두점이요 경수는 석점이요 내성은 여덟점이요 경석은 열두점이요 공신은 한점이라.(다른 사람은 미상함)
상제님 가라사대 "아홉점은 없으니 일남구녀란 말을 알 수 없도다. 팔선녀라는 말이 있으므로 여덟점을 쳤느냐." 또 응종과 경수에게 물어 가라사대 "노인들이 두 아내를 원하니 어떻게 감당하려 하느뇨." 대하여 가로대 "후천이 되면 새 기운이 돌지 아니하리이까." 가라사대 "그럴 듯 하도다." 경석에게 물어 가라사대 "왠 아내를 열둘이나 원하느냐." 대하여 가로대 "십이 제국에 하나씩 두어야 만족하겠나이다." 가라사대 "그럴 듯도 하도다." 또 공신에게 물어 가라사대 "경석은 열둘이나 원하는 데 너는 어찌 하나를 원하느뇨." 대하여 가로대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요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일양(一陰一陽)이 원리인줄 아나이다."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또 가라사대 "공사를 잘 보았으니 특히 성비하여 손님대접을 잘 하라." 하시거늘, 공신이 명하신 대로 하니라. (대순전경 pp218-219)
@ 하루는 상제님께서 대흥리에 계시더니 내성이 배알하니, 지난 번에 명으로 독방에 홀로 여러날 앉아거하며 음식을 절식하였더니, 말소리가 모기소리와 같고 기운이 없어 간신히 걸음을 옮기더라. 내성이 증산상제님께 슬피울며 애원하며 고하기를 "제자가 사경에 이르렀사오니 목숨을 구해 주소서." 하니, 증산상제님께서 내성을 쳐다보시고 슬퍼 눈물을 흘리시며 "네가 심히 굶주렸느냐." 대하여 고하기를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증산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성아, 네 소원대로 내 몸에 녹을 넉넉히 내려 줄 것이니, 이후에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옷을 입거라. 조상제사를 정성껏 지내고 농사일에 전념 하거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고, 남의 자녀를 유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고 진실되게 행동하라. 서자와 상민을 무시하고 천대하지 말고, 백정과 무당을 공경하여 대하라. 만약 네가 죄를 짓지 않고 내 명을 기다린다면, 내 세상에서 너는 영화를 누리리라."
제자가 상제님께 여쭙기를 "지금 내성으로 하여금 상제님의 명으로 여러 날 굶으며 독방에 기거하게 하시니, 내성이 이 다음에 증산상제님의 도에 큰 폐해를 남기게 되나이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성의 소원이 옷과 밥과 색에 있나니, 그 소원을 들어주어 녹을 내려주노라. 만약 내성이 마음을 고쳐 어질게 되면 대도지하에 천만다행이리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p460-461)
세번째, 안내성 성도의 살기(殺氣)를 이용해 이등박문을 제거하는 천지공사를 보시고, 싸움을 경계하시며 남과 다투고 싸우지 말라고 엄명하셨습니다.
@ 무신(1908)년 겨울에 대선생이 대흥리에 계시더니, 내성에게 명하시어 "너는 내 몸을 단단히 결박하라." 내성이 무섭고 두려운 생각으로 땀을 비오듯 흘리며 "정녕 죽을 죄를 받을지라도 어찌 감히 지존의 몸을 결박할 수 있으리있까." "내가 명을 내리거늘 어찌 명을 어기려 하느냐." 내성이 대선생의 엄명에 감히 명을 어길수 없어, 몸을 떨며 대선생께 다가가 겨우 묶는 흉내만 내거늘, 크게 야단을 치시며 "너는 나와 너불어 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단단히 결박하라." 내성이 울음을 터뜨리며 명을 받들어 몸을 단단히 결박하니라. 대선생께서 명하시기를 "내성아, 큰 곤봉으로 내 몸을 마구 치거라." 내성이 눈물을 흘리며 고하기를 "원컨대 제가 대신 맞겠사오니, 이러한 잘못을 범하게 제자에게 명하지 마소서." "내성아 너는 여러 말 하지 말고 명령대로만 행하거라." 내성이 엄명을 따라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고 몸을 떨면서 겨우 때리는 흉내만 내거늘, 크게 책망하사 "내가 다 이유가 있어서 너에게 명하는 것이거늘, 어찌 명을 따르지 않고 이렇게 때리는 흉내만 내느냐, 어서 맹타하라." 내성이 엄명에 어쩔 수 없어 부득히 하여 눈물을 흘리며 맹타하니라. 대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장차 천하의 난국을 바로잡으려면 일등박문을 가히 사용할 것이오, 이등박문을 사용함은 불가하노라." 제자가 여쭙기를 "이제 이등박문을 폐하는데 내성을 사용하심은 무슨 이유입니까." "내가 안씨 성을 썼느니라. 이등박문이 일을 하는 것이 지지부진하니, 천운이 시급하고 백성의 형편에 일이 늦음을 한하노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516)
@ 안내성이 일본 사람과 싸워서 몸에 상해를 입고 와 뵈인 데 가라사대 "이로부터 너는 내 문하에서 물러가라. 너의 죽고 사는 일을 내가 간여치 않겠노라." 내성이 이유를 몰라서 엎드려 대죄하니 가라사대 "시속에 길성소조(吉星所照)를 말하나 길성이 따로 있는 곳이 없고 일본 사람을 잘 대접하는 곳에 길성이 비치나니, 네가 이제 일본 사람과 싸우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함이라. 내가 어찌 너를 가까이 하리오." 하시니라. (대순전경 p144)
@ 안내성에게 일러 가라사대 "불의로써 남의 자제를 유인치 말며, 남의 보배를 탐내지 말며, 남과 서로 싸우지 말며, 도한과 무당에게 천하게 대하지 말라." (대순전경 p321)
증산상제님의 우려대로, 증산상제님 사후에 안내성 성도가 사치하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안내성 성도는 처음에는 고수부님을 모시고 대흥리에서 포교했지만, 교금을 낭비하며 사치한다는 말을 차경석 성도에게 듣고, 교단을 이탈하여 별도의 교단을 차리게 됩니다.
@ 안내성은 고부인이 교단을 창설한 뒤에 전라남도 순천 여수 등지에 가서 포교에 종사하더니, 갑인(1913)년 봄에 내성이 사치한 옷을 입고 말을 타고 신도 두어사람을 대리고 본소에 왔거늘, 경석이 교금을 낭비한다고 꾸짖으니, 내성이 불평을 품고 돌아가서 교단을 이탈하고 여수읍 가국리에서 따로 교단을 창설하였다. (증산교사 p69)
안내성은 그 후 을묘(1915)년에 교본부를 순천군 도산면 게표리로 옮기고, 병진(1916)년에 무안군 해제면 삼봉리로, 무오(1918)년에 전북 김제군 수류면 금성리로, 정묘(1927)년에 전주군 우림면 청도리 백운동으로 옮겼습니다. 백운동에는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켜 교인촌을 이루었습니다. 기사(1929)년에는 보천교를 나온 문정삼과 채규일을 비롯한 많은 보천교인들이 모여들어 교세가 크게 떨치자, 교명을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라고 하였고, 이 때 교인수는 3천여명이었습니다. 포교방법은 '내성이 상제님의 수제자이므로 상제께서 새시대운명을 조종하는 권한을 내성에게 주셨다.'고 역설하며, '일심으로 수도하면 멀지 아니하여 상제께서 환생하여 큰 복록을 마련하여 주신다'고 선전하였습니다.
안내성의 꿈은 팔선녀를 데리고 선경세상의 호화사치를 마음껏 누려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이같은 안내성의 꿈이 잘못됐음에도 불구하고, 안내성의 꿈이 워낙 간절하였기에, 여러 경계의 말씀을 하시며 그 꿈을 해원시켜 주지 않으면 않되었습니다. 안내성은 증산상제님을 만나 자신의 꿈을 소원성취해 나갔지만, 증산상제님께서 내려주신 경계의 말씀을 잊었기에, 시간이 갈수록 점차 정음정양의 진리와는 일탈되어 나갔습니다. 증산교사를 편찬한 이정립과 용화전경을 펴낸 김낙원은, 안내성의 '풍류와 일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 내성은 신도의 처녀 십여명을 뽑아들여서 첩으로 정하고, 또 상제님의 부인(정부인)과 사망한 아우 중선의 부인과 동서남북 사방선관의 부인을 정하여 놓고 예대(禮待)하여 풍류로써 신도들을 가르치며, 청소년의 학교교육을 금지하며, 또 신도들에게 죽음은 흉한 일이니 시체를 보면 신기(神氣)를 손상한다 하여 신도들의 상사(喪事)에 조위(弔慰)를 금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세간에 악평이 크게 일어나고 간부들이 이반하게 되어, 신미(1931)년부터 교세가 쇠퇴되기 시작하였다. (증산교사 p181)
@ 갑술(1934)년 경에 경만이 백운기(白雲起)를 불러들였는데, 백운기는 하느님이신 증산대성님과 직접 문답을 나누고 조화를 보인다고 하다가, 문답내용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신도들이 더욱 동요하게 되었다. 백운기는 증산대성은 천황(天皇)이요, 안경만은 지황(地皇)이요, 자기는 인황(人皇)을 자처했는데, 조화를 보인다고 치성실에서 거시랭이를 이용하여 붉은 무지개를 만들다가 들켜서 도주한 뒤로 경만의 신망은 더욱 멀어졌다. (범증산교사 p201 김낙원 구술)
안내성 교단의 일탈에 관한 김낙원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 김낙원은 영광 사람으로, 무오년(1918)년에 순천 양률에서 안내성을 만나서 함께 포교하다가, 갑자(1924)년에 원평의 장승백이로 올라와서 2년 동안 200여명을 포교하여 경만 문하에 다니게 하였으나, 백운기가 잡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를 따르는 신도들을 이끌고 병자(1936)년 신농사(神農社)를 조직한 채경대를 좇아 만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선도(仙道)의 교세는 더욱 약화되기 시작했다. (범증산교사 p201 김낙원 구술)
유달리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강했던 안내성은, 아버지를 찾아 중국까지 떠돌다가 우여곡절 끝에 귀국하여 증산상제님을 만났지만, 증산상제님의 간곡한 가르침을 벗어났기에, 결국 일탈된 신앙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꿈대로, 아름다운 옷과 좋은 음식에 팔선녀를 데리고 풍류의 길을 걸었던 안내성 성도는, 기축(1949)년 음력 10월에 아쉬운 생을 마감합니다. 안내성 성도가 사망하자, 신도들은 노장파의 유영주, 곽상곤(거제 사람), 백운기(충청도 사람), 소장파의 안문환(경만의 아들)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안내성 성도의 예에서 볼수 있듯이, 천지부모님이신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을 모시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정음정양의 신로를 걷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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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안내성의 풍류와 일탈 (용봉서신(龍鳳書信))|작성자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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